오리나무의 측량술을 빌려서 [손택수]
나무 수를 세면서 길을 걷던 시절이 있었지
나무가 자(尺)여서,
삼천리 방방곡곡의 측량술이어서
심은 나무가 말라 죽어도
시린 어느 집 장작개비로 뽑혀나가도
나무와 나무 사이는 틀림없이 오 리
새 눈금이 그어져도, 눈금 하나가 지워져도
누가 뭐래도 오 리였지
오리나무는 모르면서도 여전히
오리나무이지만
나무로 길을 재던 시절은 이제 없지
오리나무들은 산에나 가야 겨우 만날 수 있지
그래도 오리나무와 오리나무 사이의
간격쯤이면 좋겠네
영 볼 수 없는 당신과 나 사이에도
오리나무를 심었으면 좋겠네
아무리 먼 길도 오 리면 된다고,
오 리면 오리라고
-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2020
*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만나면 대화를 해야 하고
대화를 하다보면 침방울이 비말되어 감염될 수 있기에
가급적 거리를 두라는 거다.
그래도 가족은 한 집에 사니 거리를 둘 수 없고
또한 사회적 인간관계를 해칠 수 없어 만날 땐 만나야 한다.
그럼에도 적당한 거리두기가 필요한 때다.
오 리면 2Km니까 대화를 하려면 큰 소리로해야 할 거다.
오리나무처럼 홀로 제자리를 지키며
스마트폰으로 대화하고 당분간은 스스로 아이솔레이션을 해야 하다.
아, 이 고립감!
무섭기도 하겠지만 참아내고 견뎌내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잠잠해지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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