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막한 시간2 [김승희]
지하수가 지하에 있기를 거부하는 시간이 오면
지하수가 땅으로 올라오고
도로는 무너지고 문명의 금자탑은 스러지고
가두리 양식장은 바다로 끈을 뚫고 나아가고
지상의 것들은 속절없이 허물어져 싱크홀 속으로 삼켜지고
이 보다 더 큰 혁명이 있는가
엄마도 당신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
내 딸은 아라비안 자스민, 키도 크고 눈에서는 향기가 난다오
댁은 누구셔요?
너는 누구냐
병실 창밖으로 나비가 날아가니
아, 나비······나는 너를 안다
는 듯 환하게 미소짓고
딸을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에
로즈 마리 이리 온
두 마리 조롱조롱한 강아지에 손을 내밀면서도
나만 못알아보는 순간의
너무나도 초롱초롱한 저 눈빛
로즈마리가 자식이요 해가 달이요 병상 모니터가 은하수요
전주가 경성이요
베데스다 연못가에 옹기종기 모인 가족들
내 딸은 아라비안 자스민, 키도 크고 눈에서 향기가 난다오
번개가 쳐서 스마트 폰이 떨어지면 흰 연기가 나고
우체국 배달이 다 끊어지고
가뭄에 땅이 갈라지는데 저기 비 온다 소내기, 빨래 걷어라
장독 뚜껑 닫아라 나물 소쿠리 치워라 허공에 두 팔을
흔들며 로즈마리 밥 줘라 로즈마리를
찾는
엄마 당신은 나의 엄마인데 였는데
내 딸은 아라비안 자스민, 키도 크고 눈에서 향기가 난다오
나의엄마였다니까요
이 아귀들아 로즈마리 밥 줘
- 시로여는세상, 2015년 여름호
* 해가 늘 동쪽에서 뜨지만 어느날 갑자기 자전방향이 바뀌면
해가 서쪽에서 뜰 개연성이 있다.
총명하고 멀쩡했던 정신이 혼미해지거나 흐려질 수도 있는 것이다.
딸을 보고도 누구세요?
내 딸은 아라비안 자스민인데요.
한 얘기 또하고 또하고를 반복할 수 있다.
그런 때가 되면 전과 후가 완전히 딴판인 세상이 된다.
나이를 먹으면 몸도 마음같지 않은데 정신까지도 오락가락하면 삶의 질은 떨어진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된다.
그냥 막막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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