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276 애사 [윤의섭] 애사 [윤의섭] 내가 꾸는 가장 긴 꿈은 너와의 일초에 대해서일 것이다 그 순간 너는 무한대의 집을 지은 것이다 오늘은 남은 삶의 첫날이라며 사소한 선택일 뿐이라고 했지만 바깥은 없고 내부만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한 때였다 어떤 종말론적인 말이 발음되는 시간은 일초도 걸리지 않는다 죽어버려 미친 끝이야 세상이란 넌 그래서 그래서 아파 사랑해 이제 이초와 삼초로 이어지지 않는 가장 폐쇄적인 일초에 대해 궁리할 수 있다 무엇이 나였던가요 저 꽃 저 달 아니면 저 무수한 죽음 잘못된 질문이에요 나는 단지 별을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대답을 못했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영원이 알 수 없는 건 스스로의 시간뿐이라는 것을 우리가 본 별은 자신을 불태우는 중입니다 초신성 상태를 넘.. 2022. 5. 20. 팽나무 [신미균] 팽나무 [신미균] 팽나무 속에는 귀가 있나봅니다 새터말 아주머니가 웃말 아저씨가 무속인 박씨가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와 자질구레한 근심들을 털어놓으면 알았다는 듯 나뭇잎 몇 개를 떨어뜨려 줍니다 듣고도 못 들은 체 알고도 모르는 체 그렇게 몇 백 년 자기 얘기는 한번도 못하고 사람들의 근심에 귀기울이다보니 나뭇가지들이 많이도 구불구불해졌습니다 그 속내는 온몸이 쭈글쭈글해진 우리 증조 할머니가 아실 것 같습니다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시작, 2003 * 물미해안의 도로를 드라이브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물건리에서 시작해서 미조항까지의 드라이브 코스는 가히 환상적이다. 물건리에는 방조 어부림이라는 곳이 있고 수백년 된 나무들이 아름답게 모여살고 있다. 그중 하나가 팽나무이다. 산책 나온 모든이들의 사연을.. 2022. 5. 19. 번안곡 [이기리] 번안곡 [이기리] 빈방은 파동 닫으면 더 정확한 울음을 들을 수 있다 천장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변기 물을 내리고 그릇을 깨고 벽을 친다 물을 머금고 웅얼거리는 듯한 대화가 거뭇한 방을 맴돌고 이따금 고함과 비명이 두 귀를 잡아당긴다 위에서 들리는 건지 아래에서 들리는 건지 헷갈려서 문고리를 돌리다 말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녹슨 경첩을 보고 있으면 저녁이 창문을 찢고 들어온다 벽지는 갈라지는 방식으로 숨겨진 틈을 찾는다 침대와 벽 사이에 끼어있는 왼팔 누워 있는 것조차 버거울 때 안의 소리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동안 먼저 밖으로 빠져나간 소리가 다른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약한 방들이 많고 가까울수록 파장은 커진다 밤새 닫아 두었던 문을 열고 밖에 나오니 흰빛에 가까운 뒷모습이 들썩이고 있다 - 그 웃음을 나.. 2022. 5. 17. 파꽃 [이상문] 파꽃 [이상문] 고작, 혼자서는 넓은 안마당이 쓸쓸했을까 사랑채 뜰 위에 슬그머니 들어선 대파 한 뿌리 봄내 모른 척했더니 불쑥 꽃을 피웠다 낯선 풍경이 절경을 이룬 벼랑에 간절함이 세운 집 한 채 떠밀려본 사람들은 안다 밀릴수록 사소한 것에도 목숨 거는 억척이 스스로를 더 초라하게 하는 법인데 가끔 튀어 오르는 낙숫물에도 손을 벌렸을 저 가난이 어떻게 텅 빈 속을 감추고 일가를 지켰을까 모질지 못해 떠돌았을 생인데 파꽃보다 많은 말꽃을 피우는 툇마루에 제 몸 다 비워 핀 노인들 멀리 있는 아이들도 불러오고 꺾어진 시절도 끄집어내는 파안일소破顔一笑, 아린 바람 냄새로 풀풀 흩어지던 웃음들이 집 안에 든 미물도 함부로 내치는 게 아니라는 오래된 이야기로 다시 저녁 바람벽에 못을 박는다 서로를 다독거리다 바.. 2022. 5. 14. 이전 1 ··· 11 12 13 14 15 16 17 ··· 6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