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276 심장보다 높이 [신철규] 심장보다 높이 [신철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전기가 나갔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녹슨 슬픔들이 떠오른다 어두운 복도를 겁에 질린 아이가 뛰어간다 바깥에 아무도 없어요? 내 목소리가 텅 빈 욕실을 울리면서 오래 떠다니다가 멈춘다 심장은 자신보다 높은 곳에 피를 보내기 위해 쉬지 않고 뛴다 중력은 피를 끌어 내리고 심장은 중력보다 강한 힘으로 피를 곳곳에 흘려 보낸다 발가락 끝에 도달한 피는 돌아올 때 무슨 생각을 할까 해안선 같은 발가락들을 바라본다 우리가 죽을 때 심장과 영혼은 동시에 멈출까 뇌는 피를 달라고 아우성칠 테고 산소가 부족해진 폐는 조금씩 가라앉고 피가 몸을 돌던 중에 심장이 멈추면 더이상 추진력을 잃은 피는 머뭇거리고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고 할 말을 찾지 못해 바싹 탄 입술처럼.. 2022. 8. 8. 뮤즈의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향란] 뮤즈의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향란] 물가에 사는 뮤즈는 담배를 좋아하지 물보라를 돌돌 말아 입술 없는 입가에 갖다 대고는 물고기처럼 늘 뻐끔거리지 뮤즈는 빛이라서 아니 어둠이라서 볼 수가 없지 조약돌로 누워 버릴까 생각은 하겠지만 그건 뮤즈가 아니라서 시간의 등 뒤에서 뮤즈는 뭔가의 신호를 기다리지 밤의 결을 따라 노래 부르고 춤을 추어도 어느 곳도 가 닿을 수 없지만 뮤즈는 외로운 걸 몰라 서성대기만 하지 낮의 물가나 밤의 기슭을 내게 어느 불면의 밤이 찾아와 끊었던 담배를 꼬나물었을 때 잠들지 못하는 뮤즈가 잽싸게 날아들었지 타는 내 담배에 젖은 담배를 갖다 대며 성급하게 훅훅 빨아 들였지 그리하여 뮤즈의 담배에 불이 붙기 시작했을 때 뮤즈는 내가 되고 나는 빛과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나를 보았지 .. 2022. 8. 6. 빗방울 랩소디 [진혜진] 빗방울 랩소디 [진혜진] 우산이 감옥이 될 때 예고 없이 소나기가 쏟아진다 손잡이는 피하지 못할 것에 잡혀 있다 비를 펼치면 우산이 되고 우산을 펼치면 감옥 수감된 몸에서 목걸이 발찌는 창살 소리를 낸다 소나기 속의 소나기로 나는 흠뻑 젖는다 보도블록 위의 빗방울 절반은 나의 울음으로 남고 절반은 땅의 심장에 커다란 구멍을 낼 것이다 버스 정류장 앞 웅덩이가 막차를 기다리는 새벽 2시의 속수무책과 만나 서로의 발목을 잡는다 빗방울 여러분! 심장이 없고 웃기만 하는 물의 가면을 벗기시겠습니까 젖어서 만신창이가 된 표정을 바라만 보고 있겠습니까 어떤 상실은 끝보다 시작이 더 아파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끝이 날까 두 줄을 긋듯 질주하는 차가 나를 후경에 밀치고 검은 우산과 정차 없는 바퀴와 폭우가 만들어내는 .. 2022. 8. 5. 코스타리카에 유혹되다 [구수영] 코스타리카에 유혹되다 [구수영] 비 오는 날 꼭 커피를 마셔야 할 이유는 없지만 비 오는 아침 따뜻한 커피 한 잔은 유혹이다 무너져야 끝이 나는 유혹 앞에 붉은 입술을 내밀면 해발 천 오백 미터 화산재가 날아든다 새가 되어 편지가 되어 주말 산책길에 마스크를 비집고 날아들던 유혹의 손을 잡고 걸어오던 길 무엇으로 나는 누군가의 그리움이 될 수 있을까 가루가 되어야 닿을 수 있는 나라 온 세상 물들이는 메이드 인 코스타리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알 수 없는 나라가 한 잔의 커피가 되는 짧은 시간 무심하게 여과지를 통과하며 그렁대는 코스타리카 - 흙의 연대기, 실천, 2021 * 천안에서 커피를 잘 내리는 집으로는 '언덕위 커피나무' '산타클라라' 그리고 '미소레커피'를 꼽을 수 있다. 처음엔 서울의 '나무.. 2022. 8. 2. 이전 1 2 3 4 5 ··· 6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