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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276

처음부터 모르는 집 [송종규] 처음부터 모르는 집 [송종규] 그 집의 대문을 두드렸는데 겨울이었네 대문은 닫혀있고 라이락이 지천이었네 그 집의 문고리를 흔들었는데 캄캄한 밤이었네 다급하게 소리를 질 렀지만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네 달빛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봄날이 었네 누군가 위협적으로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는 검고 무례한 듯 보였는 데 최선을 다해 달아나고 최선을 다해 소리칠 수밖에 없었네 싸락눈이 흩날리는 늦은 가을이었었네 아무리 두드리고 아무리 소리친다 해도 그 집의 대문이 열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스쳐갈 무렵 이제 더 이상 달아나고 싶지 않았다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싶었는데, 한 천년 나는 가끔씩 그 집 앞에 멈춰서는 날들이 많아졌네 그 집의 낡은 문 고리를 흔들고 싶은 날들이 많아졌네 꿈결인 듯 하기도하고 그 봄날 저녁.. 2022. 4. 15.
겨울, 백로가 가르쳐준 것들 [복효근] 겨울, 백로가 가르쳐준 것들 [복효근] 돌아간다고도 하고, 돌아온다고도 하니 여기가 거기고 거기가 여기라는, 가고 또 옴의 그 무상함을 알아버린 듯 이 겨울 한 떼의 백로는 얼어붙은 저 개울을 고향으로 삼았나 봅니다 오늘 한 쌍 백로가 먹이 찾는 개울은 그래서 다 얼지는 않고 피라미 몇 마리는 제 품에 기르고 있어, 백로는 몇 번의 허탕 끝에 튕겨 올린 피라미 한 마리도 하늘을 우러러 삼킵니다 천지사방 까막까치 뛰노는 허접쓰레기는 많아도 저 붉은 발 수고로이 찬물에 담그고 모가지는 길어서 아무 데나 코를 박고 고개를 두르지 않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탐식하기엔 무엇보다 그놈의 깃털이 너무 희어서 아침 한때 사냥을 끝내고 날아간 뒤에는 내내 오지 않습니다 그때야 호동그란 놈들의 눈에 비칠 내 모습이 더 궁금.. 2022. 4. 12.
오리나무의 측량술을 빌려서 [손택수] 오리나무의 측량술을 빌려서 [손택수] 나무 수를 세면서 길을 걷던 시절이 있었지 나무가 자(尺)여서, 삼천리 방방곡곡의 측량술이어서 심은 나무가 말라 죽어도 시린 어느 집 장작개비로 뽑혀나가도 나무와 나무 사이는 틀림없이 오 리 새 눈금이 그어져도, 눈금 하나가 지워져도 누가 뭐래도 오 리였지 오리나무는 모르면서도 여전히 오리나무이지만 나무로 길을 재던 시절은 이제 없지 오리나무들은 산에나 가야 겨우 만날 수 있지 그래도 오리나무와 오리나무 사이의 간격쯤이면 좋겠네 영 볼 수 없는 당신과 나 사이에도 오리나무를 심었으면 좋겠네 아무리 먼 길도 오 리면 된다고, 오 리면 오리라고 -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2020 *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만나면 .. 2022. 4. 12.
수선화 감정 [최문자] 수선화 감정 [최문자] 꽃꿈이었다 수선화 한 송이가 거실로 들어왔다 슬프네 슬프네 하면 서 나를 따라다녔다 슬프다고 나에게 도착하는 것과 슬프 다고 나를 버리는 것 사이에 나는 서 있었다 아침, 꽃들에게 물을 주면서 트로트 가수처럼 흰 꽃에 게 물었다 새삼스럽게 네가 왜 내꿈에 나와 꽃꿈을 꾸는 동안 코로나 확진 받고 한 청년이 다섯 시 간만에 죽었다는 뉴스가 시청 앞을 통과하고 반포대교를 건너 거제 저구항에서 첫 배를 타고 소매물도까지 건너가 는 동안 이윤설 김희준 시인이 죽고 최정례 시인까지 죽음 을 포개는 동안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데 베란다에서 수선화 한 송이가 신나게 피고 있는 거야 죽음은 꽃과 별과 죽은 자들의 변방에서 얼어붙은 채 감쪽같이 살아 있었던 거야 한 번도 붉어 보지 못한 이 흰 꽃.. 2022. 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