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276 물이 빠지면서 [박상천] 물이 빠지면서 [박상천] 말라버린 잎새들은 푸르렀던 시절,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잎맥을 선명히 드러낸다. 잘 보이지 않던 잎맥을 드러내며 말라가는 나뭇잎. 물이 빠지는 개펄도 마찬가지다. 간조가 되면, 물이 드나들던 물길이 선명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물이 차 있을 땐 보이지 않던, 갯골을 선명히 드러내며 누워있는 개펄. 누구나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 그를 지탱해왔던 것이 무엇인지, 그가 숨기고 있었거나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드러나는 법이다. - 시와함께 21년 겨울호, 시인시대 2022 봄호 * 며칠 전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갔다. 왼쪽 팔을 내밀고 피를 뽑았다. 피를 뽑는 간호사가 '운동 안 하세요?' 말을 건다. 어떻게 아셨어요, 운동 안 하는 것을...... '팔이 가늘잖아요!' 잘 보.. 2022. 4. 2. 최후의 만찬 [정한용] 최후의 만찬 [정한용] 기차를 기다린다. 여덟 식구가 짐 보따리 위에 앉아 있다. 모두 말이 없다. 딱딱거리던 군인도 지금은 딴청을 부린다. 담배 파는 아이가 지나간다. 노인이 아이를 불러 반지를 빼주고 캐러멜을 산다. 면도칼을 꺼내 여덟 조각으로 나눈다. 가족 모두 하나씩 먹는다. 기적이 울린다. 아우슈비츠. - 천년 동안 내리는 비, 여우난골, 2021 * 영화 '피아니스트'에 나오는 한 장면을 묘사한 거다. 유태인이라는 죄로 기차역에 끌려온 사람들은 죽음의 길로 가는 길목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마지막 행위를 한다. 죽는 사람에게 반지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물론 반지에 어떤 사연이 배어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죽을 것을 예감하는데 캬라멜 한 조각이라도 등분해서 식구들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했다... 2022. 3. 30. 꽃은 혼자서 피고 진다 [김동호] 꽃은 혼자서 피고 진다 [김동호] 꽃 왈칵 피었구나 마음 부신 슬픔이다 너, 뉘게 꽃이었나 나도 꽃이었던가 저 혼자 피었다 진다 소리없이 저 혼자 - 꽃 통곡, 엉엉 붉어라(김동호시조집), 달아실, 2020 * 발문 "말과 글의 매혹에 끝내 사로잡힌 자로 사시게" (시조 백담 발간에 부쳐) 김영옥 어느 일간지에 자네 시가 게재된 걸 보고 "호작질도 10년쯤 하니 도가 되네"라며 쥐어박듯이 말 건넨 때로 부터도 다시 10년은 더 된 것 같네. 말과 글, 그쪽 세계의 견결(堅潔)함을 알기에 쉽게 건너다보고 싶지 않아 그저 저자의 속악(俗惡)에서 남루(襤褸)를 걸치고 그 세상과는 무관한 듯이 살고 싶구만 이리 들이미니 피할 도리가 없네. 무엄하게도 '도(道)'라는 말을 했거니와 살아보니 삶과 그 주변의 살이가.. 2022. 3. 29. 해피 엔드 1 [신미균] 해피 엔드 1 [신미균] 외딴 풀밭 위에 나무 빨래판 하나 누워있습니다 우툴두툴한 돌기가 다 사라져 밋밋합니다 귀퉁이도 많이 닳아 군데군데 떨어져나갔습니다 더 이상 물속에서 퉁퉁 붇거나 방망이로 두들겨 맞을 일은 없습니다 폭신폭신한 풀이 편안하게 받쳐주고 있습니다 나비 한 마리 빨래판 끝에 앉아 살살 춤을 춥니다 햇볕은 따뜻하고 하늘은 푸릅니다 - 문학청춘 21년 겨울호/ 시인시대 2022년 봄호 * 시골에 가면 아직도 나무 빨래판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요즘 도시에서는 쓸 일이 없는 나무 빨래판. 본업은 세탁을 위해 비누가 묻혀진 옷에 때를 빼라고 돌기도 주어 박빡 문때게 하였지만 부업으로는 방망이질을 당해 주는 거였는데 사실은 그게 본업에 더 맞을지도 모른다. 빨래하는 아낙은 시어머니 잔소리가 싫어서 멀.. 2022. 3. 29. 이전 1 ··· 22 23 24 25 26 27 28 ··· 6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