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276 낮달을 볼 때마다 [문태준] 낮달을 볼 때마다 [문태준] 가난한 식구 밥 해 먹는 솥에 빈 솥에 아무도 없는 대낮에 큰어머니가 빈 솥 한복판에 가만하게 내려놓고 간 한대접의 밥 - 아침은 생각한다, 창비, 2022 * 햇볕은 공평하게 모든 동물과 식물 그리고 사물에게 사랑을 준다. 하지만 달빛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아무도 모르라고 슬그머니 사랑을 준다. 더구나 낮달의 사랑은 더 그렇다. 한대접의 밥이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가난한 식구에게는 크낙한 사랑이다. 해마다 연말이면 불우이웃 도우라고 돈이나 쌀을 몰래 동사무소에 놓고 가는 이가 있다. 매일 배고픈 이들에게 밥 굶지말라고 따뜻한 국밥을 나누어주는 종교단체도 있다. 이 모든게 낮달처럼 가만히 나누는 사랑이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크낙한 사랑이다. 두 손 모아 낮달을 .. 2022. 3. 28. 증후군 [조온윤] 증후군 [조온윤] 같은 공간에 사니까 자꾸 숨이 섞이잖아 이 방에서는 말을 아껴야 한다 의자가 놀라 넘어지지 않도록 그 위에서 빛이 새는 천장을 고치는 이가 내려오지 않도록 스위치를 내린 뒷모습에서 소리가 들려도 못 들은 체한다 서로가 입 댄 컵으로는 물을 마시지 않는 우리 침이 섞이니까 싸우지 않는다 피가 섞일까봐 그거 알아? 너랑 있으면 창문 밖만 상상하게 돼 숨이 자꾸 섞이니까 이렇게 아무 말도 않고 나란히 앉아 있으면 너는 열리지 않는 밀실 같으니까 희박해지는 공기를 나눠 마시면서 우리는 서로의 등에 기대어 심장과 심장이 나누는 타전을 훔쳐 읽는다 우리가 같은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 사랑스러워 숨을 참는다 가라앉는다 이름이 섞일까봐 우리는 부르지 않는다 - 햇볕 쬐기, 창비, 20.. 2022. 3. 27. 눈이 멀다 [정진혁] 눈이 멀다 [정진혁] 너에게 가닿지 못한 이야기는 다 멀었다 눈에 빠져 죽었다 침묵은 보이지 않는 눈의 언저리를 한 바퀴 돌아갔다 바깥이 되었다 눈이 멀어서 밥이 멀고 내가 멀어서 그림자가 멀었다 어떤 눈이 나를 송두리째 담아갔다 문득 문이 열리고 306동 불이 켜지고 모퉁이 앵두나무에 앵두가 익어 갔다 세상은 공중인데 내 손은 사무적이었다 몇 발자국 세다 보면 길은 끊어지고 손끝에 닿는 대로 기억이 왔다 눈이 고요하였다 끝이 넓었다 나는 고요를 떠다가 손을 씻었다 아카시아 향기 같은 것이 종일 흔들렸다 마음 하나가 눈언저리에 오래 있다 사라졌다 누가 먼눈을 들여다보랴 눈은 멀리서 볼 수 없던 것을 보고 있다 먼 오후가 가득하였다 아무리 멀어도 더 멀지는 않았다 -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파란, 20.. 2022. 3. 21. 오늘 부는 바람은 [양균원] 오늘 부는 바람은 [양균원] 기억하지 않는다 출발을 기다리지 않고 도착을 서두르지 않는다 지나간 역은 모두 그라운드 제로 주인도 없고 객도 없다 그러니 꽃도 없고 짐승도 없는 빈터 난, 3B에 앉아 허용된 넓이로 어깨를 편다 21세기 축지법은 생략에 의존한다 접속사 접고 말줄임표 줄이고 아무 때나 끼어드는 여백, 더 이상 지나치는 게 없으므로 정지다 마침표 없는 정지는 곧바로 허공 푸른 여백에 눈으로 쓰는 것은 날아가, 지워져 다음, 다음, 다시 다음이 오면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닌 순간이 오고 또 간다 시간은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격하여 이동한다 오늘이 너무 빠르게 시작하고 또 끝나서 내일은 바닥난 우물이다 오늘을 따라잡을 수 없는 어제가 있다 채우고 다시 비우는 자리에는 기억이 머물 수 없다.. 2022. 3. 21. 이전 1 ··· 23 24 25 26 27 28 29 ··· 6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