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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개가 사라진 쪽 [고영민]

by joofe 2022. 3. 21.

해피랑 닮은 개

 

 

 

 

개가 사라진 쪽 [고영민]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는 뭘까

 

불붙은 개는 저쪽에서 달려올 테지

 

댓잎이 나오는 지금 쯤

어린 장어는 강에 오르고

열 세 명이나 들어가던 늙은 팽나무엔 연초록 새잎이 돋고

발목에 가락지를 채워 보낸 새는 

다시 돌아오고

 

누가 개에게 불을 붙였나

달려도 달려도 불은 떨어지지 않고 개는

무작정 또, 달리고

 

나는 언제부터 지루해졌을까

차량정비소로 뛰어 든 개는

결국 건물 한 동을 홀라당 다 태울 텐데

그 사이 봄은 여름에게, 저녁은

밤에게 몸을 내어주고

 

개가 전속력으로

개로부터 빠져나가는 저녁

아무리 도망쳐도 너를 위한 몸은 없다고

모든 그림자는 가장 길게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는데

 

나는 우두커니

개가 사라진 쪽을

 

 

          - 시와편견, 실천, 2021가을호

 

 

 

 

* 국민학교 다닐 때, 집에서는 개를 키웠다.

이름은 해피. 암놈이고 새끼를 낳아 그 중 한마리도 럭키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았다.

해피는 내가 하교할 때면 동네 입구까지 달려와 꼬리를 치며 반가워했고

내가 수염을 잡아당겨도 으! 이빨을 드러내지만 물지 않았던 친구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이 해피를 누군가에게 팔았고 

공주능이 있는 산쪽으로 질질 끌려가는데 안가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해피에게 불을 붙여 그슬렸을 거고 누군가는 불을 지펴 삶았을 것이다.

최고 권력자인 아버지에게 '왜 팔아먹으셨어요?'라고 대들 수도 없었던 시대의 얘기다.

어린 마음에 상처를 크게 입었던 사건이었다.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음식중에 보신탕을 먹지 않는 것은 그때의 충격때문이다.

봄이면 돌아오는 것들이 많은데 해피는 한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해피, 너는 해피하게 잘 지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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