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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276

업어주는 사람 [이덕규] 업어주는 사람 [이덕규] 오래전에 냇물을 업어 건네주는 직업이 있었다고 한다 물가를 서성이다 냇물 앞에서 난감해하는 이에게 넓은 등을 내주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선뜻 업히지 않기에 동전 한 닢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업히는 사람의 입이 함박만해졌다고 한다 찰방찰방 사내의 벗은 발도 즐겁게 물속의 흐린 길을 더듬었다고 한다 등짝은 구들장 같고 종아리는 교각 같았다고 한다 짐을 건네주고 고구마 몇 알 옥수수 몇 개를 받아든 적도 있다고 한다 병든 사람을 집에까지 업어다 주고 그날 받은 삯을 모두 내려놓고 온 적도 있다고 한다 세상 끝까지 업어다주고 싶은 사람도 한 번은 만났다고 한다 일생 남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버티고 살아서 일생 남의 몸으로 자신의 몸을 버티고 살아서 그가 죽었을 때, 한동안 그의.. 2022. 8. 16.
나를 만지다 [오봉옥] 나를 만지다 [오봉옥] 어둑발 내리고 또 혼자 남아 내 몸을 가만히 만져보네. 얼 마만인가. 내가 내 몸을 만져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 그래, 기계처럼 살아왔으니 고장이 날 만도 하지. 기름칠 한번 없이 돌리기만 했으니 당연한 일 아닌가. 이제 와서 닦고 조이고 기 름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내 몸 곳곳의 나사들은 붉은 눈 물을 줄줄 흘릴 뿐이네. 필사의 버티기는 이제 그만, 급기야 나사 하나를 바꿔볼까 궁리하네. 나사 하나쯤 중국산이나 베 트남산이면 어때, 벼락 맞을 생각을 하기도 하네. 어둠 속에서 난 싸늘하게 굳은 나사 하나를 자꾸만 만져보네. - 나를 만지다, 은행나무, 2015 * 배가 아프면 배를 만지고, 머리가 아프면 이마를 만진다. 대개는 아픈 곳에 무의식 상태로 손이 간다. 한때 운.. 2022. 8. 12.
당신이라는 말 [나호열] 당신이라는 말 [나호열] 양산 천성산 노천암 능인 스님은 개에게도 말을 놓지 않는다 스무 첩 밥상을 아낌없이 산객에게 내놓듯이 잡수세요 개에게 공손히 말씀하신다 선방에 앉아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싸우든 말든 쌍욕 앞에 들어붙은 개에게 어서 잡수세요 강진 주작산 마루턱 칠십 톤이 넘는 흔들바위는 눈곱만한 받침돌 하나 때문에 흔들릴지언정 구르지 않는다 개에게 공손히 공양을 바치는 마음과 무거운 업보를 홀로 견디고 있는 작은 돌멩이의 마음은 무엇이 다른가 그저 말없이 이름 하나를 심장에서 꺼내어 놓는 밤이다 당신 - 계간문예, 220년 가을호 * 당신이라는 말은 상대방을 높여서 호칭하는 것이나 쌈박질하는 사람들이 싸우면서 뭘 높여준다고 당신이, 어쩌구 저쩌구 하다보니 격이 떨어져버렸다. 게다가 부부간에도 .. 2022. 8. 11.
미워지는 밤 [이미산] 미워지는 밤 [이미산] 잠들기 전 꺼내보는 얼굴 하나 여긴 종일 비가 왔어요 당신도 비를 맞았나요 어두워지면 불러보죠 그곳에 어울리는 표정으로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생의 매듭이 된 당신 미소로 시작된 우리의 처음이 있었고 미소로 주고받은 뜨거운 질문이 있었고 질문의 동굴에서 실패를 걸어놓고 사랑이라는 게임을 하며 수없이 들락거렸죠 물방울 뚝뚝 떨어졌죠 나는 어제 내린 빗물이라 하고 당신은 아담과 이브의 눈물이라 하고 언제나 동굴의 자세로 당신은 나를 안아주었죠 그리하여 우리는 각자의 동굴 이후라는 그리움 이제는 혼자 걷고 있죠 우리의 비 수억 년 떨어지는 그 물방울 한때 미치도록 궁금했던 모든 당신 자꾸만 희미해지는 이런 내가 미워지고 있죠 - 궁금했던 모든 당신, 여우난골, 2022 * 사랑과 우정.. 2022. 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