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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인동초 [송병숙]

by joofe 2022. 1. 17.

 

 

 

인동초 [송병숙]

 

 

 

 

휘감는 것은 뼈대가 없다

제 몸뚱아리마저 휘휘 뼈대를 세우고 꽃을 피운 인동초

긴 손톱을 내밀어 한 생애를 묻는다

 

당신도 한번?

 

솜털이 보송송한, 눈치 없이 살가운

이 곡선의 담금질 앞에서

누가 어설픈 누대라고 고개를 젓겠는가

 

희게 붉게, 때론 노랗게 낯빛을 바꾸며

몸집을 불려나가는 인동초

 

매운 손톱에서 불똥이 튄다

뼈대 없이 혹한을 건넌 이마에는

노란 독기가 방울방울 꽃망울 졌다

 

극한을 버틴 만큼 뼈대가 굵어졌다는 거와

단단한 것만이 뼈가 아니라는 거와

속없이도 세상 하나를 점령했다는 거와

 

제 몸을 얽어 중심을 세우는 동안

웃자란 넝쿨손이 새 담장을 움켜잡는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작은 도랑 같은 거라고

주춤거리는 두 발에 단단한 쐐기를 박아놓는다

 

햇살 좋은 봄날

꽃은 무슨 사명처럼 기어올라

 

스무 살 여자의 목덜미에서도

수백 살 분청사기에서도

나풀나풀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 뿔이 나를 뒤적일 때, 달아실, 2021

 

 

 

 

 

* 삼,사년 전까지 다니던 직장은 담장이 아닌 펜스가 둘러쳐져 있었고

펜스를 타고 배배 꼬아 덩쿨(덩굴의 비표준어이나 뉘앙스상 느낌은 덩쿨이...)을 올렸던 인동초.

금은화라고도 하는데 흰꽃이 피었다 노랗게 변해서 금과 은이 섞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봄에 피는 꽃인데 겨울인 지금은 맹추위를 견뎌내고 있는 중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올 수도 있으니 고생이 사명 내지는 소명일 수 있겠다.

'견디다'의 방언이 '전디다'인데 긴 긴 겨울을 잘 전디고 나면 예쁜 꽃과 향기를 만날 수 있을 게다.

봄이면 종이컵에 한가득 인동초꽃을 따서 책상 위에 두고 향기를 즐겼던 기억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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