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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야생 [이현호]

by joofe 2022. 1. 17.

야생 [이현호]

 

 

 

 

꿈에서도 울었다

잠을 깼을 때는 배가 너무 고파서

눈물로 밥을 지을 수도 있었다

 

슬픔은 인간의 집에 내려오는 멧돼지 같은 것

그 어금니로 헤쳐놓은 감자밭처럼

모조리 뽑고 부러뜨린 옥수숫대처럼

쑥대밭으로 폐허로 만드는 것

 

용기를 갖자 밥도 잘 챙겨먹고

짓뭉개진 밭에서 몇 알의 성한 감자를 고르며

쓰러진 옥수숫대를 일으켜 세우며

밀알 같은 눈물을 흘리는 우리가 꿈속에 있다

 

굶주린 멧돼지는 다시 인간의 집을 찾고

우리를 꿈에서 건져줄 신은

스스로 만든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 했다

 

억센 털을 바짝 세우고 씩씩거리며

뒷발을 구르는 멧돼지와 마주쳐서

피할 생각도 못하고 온몸이 얼어붙어서

돌진해 오는 슬픔에 갈비뼈가 산산조각 나는

 

오늘 밤도 울면서 꿈을 꾼다

이런 날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널렸고

멧돼지도 우리도 언제까지나 배가 고플 것이어서

 

봐라, 슬픔이 온다

 

     - 시와 표현 2019년 9 · 10월호

 

 

 

 

 

* 배가 고플 수 있는 환경이 곧 야생이다.

아프리카 평원에서 사자라고 날마다 연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아니다.

때로 하이에나에게 빼앗기기도 하고 그래서 굶기도 한다. 입맛만 쩍쩍 다시며.

인도 뭄바이의 어느 휴게소에서 만난 소와 들개는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서로 으르렁댄다.

가난한 나라의 쓰레기통에서 무얼 챙겨먹을까만은 거기서도 피튀기는 경쟁을 한다.

굶지 않으려고 그 착한 소도 으르렁대야만 했다.

화장실 변기 뒤에 작은 거미가 작은 거미줄을 치고 날파리를 기다리고 있다.

날파리가 창문 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거미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을 텐데...

오, 제발 날파리가 거미줄에 달려 작은 거미가 홀쭉해지지 않길.

인간이라고 굶지 않고 사는 건 아니다.

지하철에서 역무원들의 눈을 피해 단돈 천원짜리를 파는 장사꾼도 열 개밖에 못판다면

점심값도 나오지 않는다.

인간사회도 야생과 다르지 않다.

꿈에서는 굶어도 현실에서는 눈물로 밥을 짓더라도 굶지는 말아야 한다.

돌진해오는 슬픔에 투우사처럼 멋지게 빨간 망토로 살짝살짝 피해갈 일이다.

얼마든지 널린 그날들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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