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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다시 안개극장 [하두자]

by joofe 2021. 10. 5.

낮달, 노명희화가 그림

 

다시 안개극장 [하두자]

 

 

 

 

 

  또 다시 너야, 나에게 호의적이지도 않으면서, 건조한 노면 위를 스

멀거리며 춤을 추면서 피어오르고 있어. 함부로 뒹굴지 않았지, 그러

니까 소리 없이 스며드는 방식도 때론 괜찮아 흘러갈 뿐이야. 이런 날

은 목을 빼고 네 안부를 묻고 싶어 우리가 한 때 다정했던 걸 너만 알

고 있으니까 느긋하게 갈비뼈를 만지듯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지 한

올 한 올 풀어내느라 한 잠도 잘 수 없는 스웨터처럼. 이대로 지워도

괜찮다고 속삭이지, 그런데 그 밤을 힘껏 밀치면 이제 신음 자욱한 기

억으로만 남아 있어 우리는 명징하게 서로를 알아 볼 수 있지만 은밀

함이 없어, 달아날 수 없는 네가 어디까지 나를 끌고 가는지. 휜 등을

보이는 그 어스름이 깊고 처연하게 얼마만큼 우리의 심장을 지웠는지

너만이 품고 있어, 듬성듬성 건너서라도 너에게 가고 싶은데. 앙다문

이빨 사이로 붉은 반점이 돋아나올 것 같아서 주춤 거렸지. 흔들림과

중얼거림을 반복하는 사이, 잠깐의 그 모든 게 저렇게 지나갔지. 떠나

간 얼굴이 가로질러 가는 것 같아. 서둘러 지우며 내 몸을 닦아내야

했을까. 발가벗은 나를 어디에다 걸쳐두어야만 했을까. 너는 여전히

부서지지 않고 살아서 내 품속 숨결로 달라붙는데1

 

               - 웹진 "시인광장" 2021년 9월호​

 

 

 

 

 

 

*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아주 짧게 드라마틱함을 보여주지만

실제의 삶은 굴곡이 아주 많아서 마치 허들경기와 같다.

허들 하나를 넘으면 또 허들이 나타나고 또 뛰어넘고 또 뛰어넘고......

101년을 살았다는 노학자는 일제시대, 육이오, 오일육 쿠데타, 시월유신을 거쳐

또 한번의 군사정권과 아이엠에프, 코로나를 겪고 있으니

가장 많은 허들을 넘었을 게다.

누구나 이런저런 허들을 넘으며 안개극장을 헤쳐나왔을 테다.

나아지는 삶을 살았던 세대에 비해 지금의 2030세대와 이후의 세대는

먼저 살았던 세대가 누렸던 것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물려줄 수 있는 건 "이 또한 지나가리라!"란 신념 뿐이다.

이 안개 같은 허들을 잘 뛰어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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