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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최승자]

by joofe 2022. 2. 12.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최승자]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들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 콘크리트 벽이 워낙 견고해서 무너뜨린건데

오히려 콘크리트는 더욱 견고하고 더 높아져서

우리에겐 오직 바스라지는 일만 남았다.

무참히 꺾여지고 꽃병에나 가두어질 뿐.

 

키 작은 관목들을 볼 수 있고

낮은 땅에 이름없는 풀들도 햇볕을 쬐도록

콘크리트 벽을 낮추어 다오.

숨 쉴 수 있게 견고함을 내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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