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도 모르고 읽는 책 [심재휘]
처음 가보는 바닷가였는데
해변의 여관방에 자리를 깔고 누웠더니
그곳에는 어두울수록 잘 읽히는 책이 있었다
밑줄을 칠 수도 없고
귀를 접을 수도 없는
사실은 읽어도 뜻을 알 수 없는 책
그 옛날 고향의 순긋 해변에 가면
무허가 소줏집에 가면
레코드 판을 따라 돌아가던 노래
아껴듣던 그 노래를 생각하는 밤이었는데
노래는 시들고 소줏집은 철거되고
그러다가 몸은 누워 잠이 들었는데
뜻도 모른 채 페이지만 절로 넘어가는 책
똑같은 소리가 밤새 계속되는 것 같아도
잘 들으면 매번 다른 소리를 내어서
잠들기 전에 소리를 세는 가련한 밤이었는데
나는 그 책을
버리지 못하고 들고 온 모양이라
오늘은 그 먼 바닷가가
곁에 와 함께 눕는 밤이다
뜻도 모르고 다만
사전에도 없는 그 순긋한 소리에 빠져
뜻도 모르고
-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창비, 2022
* 일천구백구십년 쯤,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아야진을 갔었다.
여느 해수욕장과 다르지 않지만 특이한 건 가리비양식장이 있어서
가리비를 이만원어치 사면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번개탄과 석쇠를 함께 주어서 모래사장에서 구워 먹었다.
순긋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이 파도가 바로 위 통천 파도와도 통정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즈음에 통천군 고저읍 읍민회를 한다기에 수유리, 어느 공원을 어머니와 다녀왔었다.
아버지의 고향이 강원도 이북, 통천군 고저읍이어서
혹시라도 아버지를 아는 분이 있나 찾아가 보았다.
아주 연로하신 할아버지가 "아! 영근이. 바닷가에서 한 백미터쯤 떨어진 곳에 살았었지"
다른 정보는 없었고 그저 바닷가에 살았다는 것 말고는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어부였을까?
아버지의 조상들도 어업을 하며 살았을까?
순긋하게 철썩이는 파도를 볼 때마다 '아버지는 어부였을까?'
갈 수 없는 그 먼 바닷가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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