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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우리는 낙엽처럼 [나희덕]

by joofe 2022. 3. 13.

 

 

 

 

 

 

우리는 낙엽처럼 [나희덕]

 

 




우리는 낙엽처럼 떠돌고 있어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러나 한번도
잊은 적 없는 당신을 찾아서.
세상은 우리의 무임승차를 허락하지 않아요.
바람과 안개만이 우리를 데려다주지요.
오늘은 눈까지 내렸어요.
죽어가던 흰 말은 눈 위에서 죽어버렸고
저녁은 그만큼 어두워졌지요.
우리는 낙엽처럼 서로 몸을 포개고 잠이 들어요.
꿈속에서 당신을 만났지만,
당신은 인화될 수 없는 필름 속에만 있어요.
손을 뻗으면 금방 닿을 듯한
안개 속의 한 그루 나무, 그러나
그 나무는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몰라요.
그래도 우리는 계속 걸어요,
안개가 우리를 완전히 지워줄 때까지.
처음 사랑에 눈을 뜬 것도
피 묻은 손으로 치마를 끌어내린 것도
안개 속에서였지요.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당신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어요.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우리는 낙엽처럼 떠돌고 있어요.
나무의 일부였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호루라기 소리와 억센 팔들을 피해,
우리는 안개의 일부가 되어야 했어요.
이제 우리는 강을 건너요.
한 조각 배를 타고
그것이 삶과 죽음의 경계인 줄도 모른 채.
조금만 기다리세요. 다 왔어요.

 

 

* 테오 앙겔로뿔로스 감독의영화 「안개 속의 풍경」중에서.

 

 

                                             -야생사과, 창비 ,2009

 

 

 

 

 

 

 

* 외국영화나 다큐를 더빙할 때 약간은 느리고 우스꽝스럽게 말한다.

이 시는 왠지 성우들이 더빙하듯이 읽게 된다.

있어요, 않아요, 몰라요, 건너요, 기다리세요......

 

산다는 게 영화 같기도 하고 다큐 같기도 하니

우리는 낙엽처럼 떠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 조금만 기다리세요. 다 왔어요.

안개 속을 헤매며 어딘가를 향해 걷고 또 걷는다.

우리의 여정이 누군가에게 읽혀질 때에도

약간은 느리고 우스꽝스럽게 읽혀질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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