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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시간은 늘 나와 함께 가네 [이승하]

by joofe 2022. 3. 10.

 

 

 

 

 

시간은 늘 나와 함께 가네 [이승하]

 

 

 

 

 

 1

시간은 나를 아프게 할 것이니

때가 되면 아파하자

시간은 나를 병들게 할 것이니

때가 되면 병들자 때가 되면

임종의 순간을 기다리자

유기체로서의 마지막 순간을.

 

2

내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

이 지구상 수많은 생명체는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을 테지

있을 테지

생명을 준비하려 막 회임하는 여인과

생명을 완성하려 막 진통하는 여인도

 

내 고고의 울음을 터뜨린 그 시간에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거나

막 숨을 거둔

지구상 수많은 생명체들아

죽을 수 있어 너희들과 나는

동격이다

 

3

1960년 4월 18일이었지요

저는 어머니와 힘을 합쳐

사력을 다 했지요

경북 의성군 안계면 그 시골 병원에서

어머니는 자궁에서 저를 내보내려고

위험할 정도로 하혈을 하고

저는 밝은 세상으로 나오려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4

현자가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어떻게 다른지를

그저 주어진 시간은 1초도 없고

사는 동안만 나 살아 있을 테니

시간에게 지불해야 될

하나밖에 갖고 있지 않은

내 목숨일 테니.

 

5

태어난 그 순간부터

지상에서 숨쉬기 시작한 내 몫의 시간이여

나와 더불어 살아가기를

나 죽는 순간부터

나 없는 세상에서 존재할

삼라만상이여

시간이 허락한 내 생명 현상이 끝나더라도

창창한 시간과 더불어

짱짱하기를.

 

                 - 뼈아픈 별을 찾아서, 달아실, 2020

 

 

 

 

 

 

* 좁은 문으로 내보내려는 어머니와 좁은 구멍으로 나가야 하는 나와의 사투.

하지만 나는 사투가 필요없었다.

거꾸로 들어선 까닭에 어머니의 배에 칼을 대고 손쉽게 세상에 나왔다.

그래서 압출진통의 의미를 몰랐을까.

쉽게 쉽게 세상을 살았던 것 같다.

세상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걸 진작에 깨닫고 나왔어야 했는데 ...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압출진통을 겪고 나와 사는 게 힘들다는 걸 알고 사는 것 같다.

 

시간의 끝이 있을런지 모르지만

별들도 언젠간 진통을 마치고 소멸의 문으로 들어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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