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 감정 [최문자]
꽃꿈이었다
수선화 한 송이가 거실로 들어왔다 슬프네 슬프네 하면
서 나를 따라다녔다 슬프다고 나에게 도착하는 것과 슬프
다고 나를 버리는 것 사이에 나는 서 있었다
아침, 꽃들에게 물을 주면서 트로트 가수처럼 흰 꽃에
게 물었다
새삼스럽게 네가 왜 내꿈에 나와
꽃꿈을 꾸는 동안 코로나 확진 받고 한 청년이 다섯 시
간만에 죽었다는 뉴스가 시청 앞을 통과하고 반포대교를
건너 거제 저구항에서 첫 배를 타고 소매물도까지 건너가
는 동안 이윤설 김희준 시인이 죽고 최정례 시인까지 죽음
을 포개는 동안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데
베란다에서 수선화 한 송이가 신나게 피고 있는 거야
죽음은 꽃과 별과 죽은 자들의 변방에서 얼어붙은 채
감쪽같이 살아 있었던 거야
한 번도 붉어 보지 못한 이 흰 꽃이라도 사랑해야지 사
랑해야지 하면서 나처럼 물을 주고 나서 죽은 자들 모두
는 흡흡거리며 각자 죽음의 언덕을 다시 기어오르고 있었
던 거야
공터에서
한 사람의 마음 이쪽과 저쪽을 돌아다니다가
죽음이
익명으로 숨죽이고 있는 나를 찾아내는 거야
등짝에 툭툭 별을 떨어뜨리는 거야
산책을 하다가도
나는 정말 죽었는가? 하고
사람들은 죽음을 꽃처럼 바라보았다
오래오래
이토록 허약하고 목이 메는 부분을 사람이라고 부르며
나는 사람을 쫓아다녔던 거야
아무도 부르지 말고 피자 꽃피자
아침에도 수선화는 그냥 그렇게 피었던 거야
격렬한 신념 같은 거 없이
이런 흰 꽃은 죽어라고 피면 죽음도 그칠 줄 알았나?
뉴스와 창백한 오후와 거친 밤이
마스크를 쓰고 날마다 나에게 팔을 내미는 거야 손을
내미는 거야
꽃꿈은
설렘이 아니고 새파란 공포인거야
-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 민음사, 2022
* 노란 수선화가 눈에 확 들어오는 바람에 흰 수선화가 있었던가? 궁금하던 차에
친구가 흰 수선화 향기가 죽여준다는 말을 해줘서 아, 맞아! 흰 수선화도 있었지.
그런데 향기가 있다구?
하긴 수선화를 멀리서만 보았지 향기를 느껴본 적은 없으니 수선화 감정을 알 수가 없었지.
갑작스런 죽음에 부고를 띄울 수도 없고 장례절차조차 어렵고 심지어는 화장장도 꽉 차서
신속항원검사 줄 서듯이 화장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지금이다.
매일 매일 똑같은 뉴스를 접하며, 수선화처럼 감정을 잡을 수 없어 덤덤하니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흰 수선화가 향기가 있다고 하니 죽은 자들이여, 당신들에게도 나름 향기가 있었었음을 기억하시라.
가는 그 길에 수선화처럼 향기 흩날리며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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