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와 감상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by joofe 2022. 4. 20.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또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짓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출처; 시사랑에 올려진 시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희노애락을 운명처럼 껴안고 살아야하는 게 인생인가보다.

요즘 추억을 소환하는 게 유행이다.

탑골공원이라는 유튜브에서 옛날 노래들을 찾아듣는 게 유행한단다.

슈가맨이라는 티비프로그램에도 양준일 등등이 출연해서 추억을 소환하고 있다.

양준일이 활동하던 때의 사진을 보면 백석처럼 잘 생기고 시대를 앞서가는 모습이었다.

지금 시대에 백석이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뭐, 그래도 언제나 그랬듯이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살았을 게다.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방인 [장혜령]  (0) 2022.04.24
첫사랑이 아니래도 그카네 [박제영]  (0) 2022.04.21
터치 [손택수]  (0) 2022.04.20
냉이꽃 [손택수]  (0) 2022.04.20
슬픔의 바깥 [신철규]낮달  (0) 2022.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