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장수들 [김형수]
나는 어릴 때 약장수 굿을 좋아했다
손에는 하모니카, 등에는 큰북, 발뒤축에는
심벌즈를 치는 끈 달린 신을 신고
보여요? 안 보여요 들려요? 잘 안 들려요
부딪치는 발길에 밀려드는 파도에
애들은 가라!
감기 든 날 오후에 이불 속에 묻혀서도
어른들 가랑이를 끼어 다녔다
그리움은
어둠 속 별처럼 허기진 가슴에 빛을 뿌린다
약장수가 오면, 약장수가 와서 또 굿판을 벌이면
팡팡 쏟아지는 말씀의 포탄들
새떼도 놀라고 낮달도 아득히 머리 위를 떠가지만
석양이면 장터는 멸망한 왕조처럼 빈터만 남는다
돌아서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것을
약장수 떠들던 제품도 효능도 썰물에 씻겨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생각나요? 아무 생각 안 나요
그래도 세상은 장터로 변하여
정치도 시도 약장수들 판이다
- 가끔 이렇게 허깨비를 본다, 문학동네, 2019
* 짜고 치는 고스톱일 수도 있을 텐데 북치고 장구치고
따따따 세치 혀로 정신을 혼미하게 하니
허접한 약인 줄 알면서도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지폐를 꺼내게 하는 마술이었다.
장터의 약장수들은 거의 개그맨 내지는 연설가 수준이었다.
요즘은 그리운 장터, 약장수 풍경이지만 사라진지 오래다.
그래도 세상은 장터가 되어 때만 되면 일톤 트럭에 올라 약을 판다.
스피커에 대고 왈왈거리는 공약은 그럴듯해서 깜빡깜빡 속아넘어가기 쉽다.
정치인들이 그렇다는 얘기다.
엇! 그런데 시인들도 약장수?
정신 사납게 하는 일은 없음에도 약장수라는 표현은 좀 과하겠다.
그러나 약장수일 수도 있다.
시 한 줄에 눈물 줄줄 흘리며 가슴 시원해 하고
시 한 줄에 절에 온 듯 마음이 정화되니 그 또한 약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
시인이 약장수임이 밝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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