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김수우]
무청시래기, 햇살을 꼬며 빈 암자를 지킨다
주둥이 풀린 양파자루, 금간 대야, 홀로 핀 수선화를 지
킨다
옹색한 부처를 이해하는 보살보다 기적을 기대하지 않
는 주지보다
퍼질러 앉아 당당한 것들, 산사의 고요를 알처럼 품었다
흘러오던 물소리, 흘러가며 봇도랑을 지킨다
며칠 째 바람을 물고 당기던 산벚나무, 종일 고무슬리퍼
를 지키고 있다
번갯불 가지고 다닌다는 금강역사가 따로 없다
- 몰락경전, 실천문학사, 2016
* 우리는 모두가 내가 주인이요,라며 갑 행세를 한다.
실은 을인데 갑으로 아는 것이다.
무청시래기를 널고 양파를 꺼내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내가 만지고 바라보고 돌본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주인이다.
주인인줄도 모르고 감히 무청시래기를 무시하고 양파를 난도질하고
물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다.
감히 주인을 몰라본 죄, 훗날 이들이 주인이 되어 나를 맨뒷줄에 세우고 말 게다.
구석탱이에서 두 손 들고 온몸으로 반성문을 쓸 것이다.
** 백년어서원 가본지도 꽤 되었다.
오랜만에 '몰락경전'을 펼쳐보다 김수우시인이 시집에 꽂아준 네잎클로버가 툭 삐져나왔다.
오홋, 행운의 네잎클로버가 시집을 지켜준 주인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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