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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느릅나무가 있는 카페 [송종규]

by joofe 2021. 10. 24.

느릅나무가 있는 카페 [송종규]

 

 

 

 

 저 의자는 오래 전 당신이 비워 둔 것이다
 이 컵의 자국은 오래 전 당신이 찍은 얼룩이다
 다소 느슨하게 돌아가는 벽시계는 오래 전 당신이 벗어

둔 외투,

 고무나무와 아레카 야자가 있는 창가에 우두커니 당신

은 서 있다

 바람이 불거나 해가 지는 것처럼 아주
 일상적인 시간이 태연한 척 이곳을 지나가지만
 새들이 끼룩거리거나, 누군가 무심하게 창문을 여닫는 것

처럼 아주
 사소한 사건들이 문밖을 기웃거리기도 하지만
 수많은 당신이 앉았던 의자와 컵에 찍힌
 입술과 손가락의 지문, 그리고
 헐거운 외투
 적요하고 고즈넉한 이것은
 느리고 게으른 삶이 부려놓고 간 농담 같기도 하다

 이미 오래 전에 당신과 나는
 무한정의 햇빛과 공기를 나누어 마셨다
 그러나
 그 긴 세월 내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당신을
 신발을 신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마다 손바닥 가득

만져지는 당신을
 나는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나

 손가락 꼽으며 기다리던
 빈 의자와 빈 컵 그리고 소복한
 날짜들

 

             - 공중을 들어올리는 하나의 방식, 민음사, 2015

 

 

 

 

 

* 햇볕이 좋고 바람도 부드러운 토요일,

한 시인이 찾아왔다.

호수가 보이는 곳에서 차나 한 잔 하자고.

천안시내에서는 좀 떨어진 아산의 신정호수에 갔다.

간단히 마음에 점을 찍고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 가서

찰랑거리는 호수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따뜻한 커피가 진하고 맛있다는 말을 했다.

좀더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호수 주변을 거닐었다.

어느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시가 써지지 않는다는 얘기를 나누었다.

송종규시인에 대한 얘기까지 느릿느릿...

적요하고 고즈넉한 풍경앞에서 시를 다시 써야되지 않겠냐고 말하고 

빈 의자를 남긴 채 갔던 길을 돌아와 다시 호수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다시 커피 한 잔씩 마셨다.

 

언젠가 다시 쓰는 시를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가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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