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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생활의 실패 [박용하]

by joofe 2021. 10. 28.

 

생활의 실패 [박용하]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누구를 지배하지도 않는다

꿈결 같은 생활이 여기에 있다

 

강자한테 덤비고

약자한테 함부로 하지 않는다

꿈속 같은 생활이 여기에 있다

 

누구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꿈의 생활이 여기에 있다

 

이런 생활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고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오늘도 죽어가고 있다는 불변 앞에서 피는 돈다

소박한 생활 앞에서 내 피는 열렬하고

우상은 멀어지고 우애도 빛을 잃고

거창한 꿈 없이 나는 내 발 위에 서 있다

발 위를 가며 평범한 생활을 생활한다

(오죽했으면 그 사람은 평범이 그립다고 했을까)

 

사람들 만나 떠들고 술 마시는 게 점점 귀찮아진다

내가 하는 말이 귀찮아지듯이 그들이 하는 말이 귀찮아진다

내 부모형제가 귀찮아진다

같이 밥 먹는 게 귀찮아진다

그들이 나의 말, 나의 생활을 재미없어 하듯이

나는 그들의 말, 생활이 재미없다

재미없는 정도가 아니고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언어관과 정치관이 적개심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 모이는 데 가는 게 점점 귀찮아진다

영화관까지 가는 게 귀찮고

강연장까지 가는 게 귀찮고

맛집까지 가는 게 귀찮고

비행기 타고 가는 게 귀찮고

예식장 가는 건 아주 귀찮고

상갓집 가는 건 그나마 낫고

괴력난신 같은 건 내다버린 지 옛날이고

음악도 밀쳐 두고 백지 앞에서

노래 부르지 않는 노래를 하면서 지낸다

혼자서 혼자를 즐거워하며 지낸다

 

믿음은 하루아침 같고

우정은 하루저녁 같고

 

그런가 하면

어떤 날은 이승을 등에 업고 저승을 배에 안고

아주 딴사람이 된다

그 사람이 되어 본다

(일상이 그립다고 한 사람의 절규가 들리지 않는가)

 

           - 월간 현대시, 2021년 4월호

 

 

 

 

 

* 전쟁이 있었던 1950년이 이렇진 않았을 거고

아이엠에프 시절에도 이렇진 않았다.

일상을 통째로 잃어버린 건 이번이 처음일 것 같다.

코로나로 완전히 일상이 무너져내려 다른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다.

마스크를 쓰고 대화하기도 힘드니 그저 침묵.

대신 카톡이나 문자로 소통하니 손가락만 일상 속에 있는 듯하다.

결혼식? 계좌로 쏴주마.

부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문자 하나 넣어주고.

이런 게 평범은 아니었는데 평범한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자영업자의 절규가 귀에 쟁쟁해서 일부러 밥을 사먹고

일부러 커피를 사마신다.

주유소가 셀프로 바뀌지 말라고 일부러 주유원이 있는 주유소를 찾아다닌다.

이제 이런 게 일상이 되어가고 평범이 되어간다.

 

과거의 일상이 하루아침이고 하루저녁이니

그저 잊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