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여운 거리 [허연]
베란다에 걸려있는 빨래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생은 잠시 초라해졌다가 다시 화색이 돌기도 한다
경멸할 것은 없다. 어차피 다 노래니까
나는 이 위험한 계보를 알고 있다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이
약기운에 지친 환자처럼 얌전해지는 밤을 알고 있다
서리 낀 창밖은 질문으로 가득하지만
여기선 답을 하지 않는다.
질문 속에 답이 있거나 혹은 답이 두렵기 때문이다.
도시의 동쪽에는 노숙인들이 낮 시간을 보낸
긴 의자들과 고장 난 그네가 있다
나중에 봄이 되었을 때
의자와 그네에는 새로운 색이 칠해져 있을 것이다.
겨울이 오기 전 거리가 파헤쳐지면
사람들은 비로소 도시를 이해한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가끔 새들이 태어났다.
도시는 자꾸만 바람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고
나는 들려오는 모든 소리들이 구타처럼 느껴진다
(나도 한 거리를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다)
도시의 거주민들은 비가 언제까지 내릴까 하면서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리에는 장례식이 있었다
- 시로 여는 세상, 2020 겨울호
* 어렸을 땐 명동에 나가 명동을 즐기고 명동을 누렸다.
어느 순간 중국인들이 넘쳐나고 문화가 사라졌다.
중국인들이 물러가고 화장품 가게들이 철수했다. 텅 빈 명동거리가 되었다.
홍대앞 거리는 가난한 청년들이 미술이며 음악이며 새로운 문화를 발명했다.
자본을 앞세운 중산층이 들어와 쑥대밭을 만들고 망원동으로 옮겨 갔지만
망원동도 다를 바 없이 되었다.
신촌이 그랬고 삼청동, 경리단길이 그랬다.
자꾸 밀려오는 바람에 밀려 밀려 사라지는 텅 빈 거리들이 비명이고 아우성이다.
아끼고 사랑하는 거리가 남아있으면 안 되는 걸까.
인사동 거리에는 화장품 가게들이 점령하면서 옛 문화는 사라지고
대추차 마시던 가게도 사라지고 멋과 맛을 알려주던 문화도 추억에서 멀어져 갔다.
오래 오래 사랑할 수 있는 거리를 지킬 방법은 없을까.
녹이 좀 슬어도 낭만이 남아있길 바라며 삼,사백년 이어지는 거리가 많아지길 바란다.
아쉬운 젠트리피케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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