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을 나서다가 [이규리]
현관문을 나서다가 나는 다시 돌아오지요 돌아와선 왜 왔는지 잊
어버려 다시 나가요 나가다가 생각하니 그게 시계였어요 시계를 찾기
위해 내가 뒤지는 곳은 시계가 없는 곳이죠 당신과 헤어지기 위해 만
나는 것처럼 시계를 찾다가 시간을 잃어버리는 일, 시간을 찾다가 손
목을 잊어버리는 일, 새롭지도 않아요 오늘은 약국에 들러야 하는데
잃어버리는 걸 잊어버리는 약을 사야해요 하얀 알약을 보면 왜 죽음
이 생각나는지 아세요 편도염을 낫게 하는 알약을 한꺼번에 털어 넣
고 죽은 아랫방 언니가 있었거든요 한 알씩 시간 맞춰 먹어야하는 일
을 잊었나봐요 나는 오늘 빨간 구름약을 살 거예요 깜빡깜빡 잊는 약,
시계는 아직 찾지 못하고 꼭 찾아야 할 이유도 없어요 시간은 이미 멎
었어요 뭔가를 깜빡 잊는 일, 짜릿한 쾌감이에요 현관을 나서다 나를
잃어버리고 빨래통에 벗어놓은 나를 찾아 뒤집어쓰고 나 아닌 내가
다시 나가요 나가다 생각하니,
- 2012 오늘의 좋은 시, 푸른사상
* 요즘 현관문을 나서려면 문에 붙여놓은 '앗! 마스크'란 문구를 보게 된다.
딸이 붙여놓은 경고 문구인데 가끔 깜빡하고 그냥 나가는 경우가 있다.
지하주차장까지 모르고 내려갔다가 이웃주민들이 힐끔거리면
그때서야 아차!한다.
급한대로 손으로 입틀막을 하고 다시 현관문으로 돌아온다.
코로나때문에 이느므 깜빡병이 종종 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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