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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소 [강신애]

by joofe 2021. 11. 9.

인터넷에 떠있는 그림을 퍼옴.

 

소 [강신애]

 

 

 

 

안개 속에서 검은 소를 만났다

구정물과 젖은 풀의 냄새를 풍기며 천천히

어디로 가는 중이었는지

나를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나도 가만히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이 성스럽도록 멀었다

이상하게도 소의 등허리에는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춥지 않니?

눈을 털어주려 손을 올려놓았을 때

갑자기 고개를 돌려서

놀란 나는 뒷걸음질 쳤다

소도 놀란 듯 했다

 

자동차도 뜸한 길가

안개의 발판마다

젖은 선율이 튀어나왔다

뒤에서 희미한 울음소리를 들은 듯 했지만

더듬듯 계속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

안개로 윤곽이 무너진 소를 만났다

흐린 등에는

내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무거운 마침표처럼,

소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

누군가를 기다리듯 거기 우두커니

 

              - 불타는 기린, 천년의 시작, 2009

 

 

 

 

 

 

* 칠,팔년전쯤 인도의 공장을 방문하느라 뭄바이에 내려 

공장이 있는 푸네에 갔다가 다시 뭄바이로 돌아오며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린 적이 있다.

허름한 휴게소에는 우리나라 휴게소처럼 소시지 커피 햄버거 같은 걸 팔았다.

화장실 옆에 쓰레기장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잿빛 소가 쓰레기를 뒤지고 있었다.

들개가 으르렁거리면 소가 뿔로 들이받는 흉내를 내며 별것 아닌 음식물을 놓고

싸우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자축인묘진사오미... 동물들을 나래미 세워 쥐가 일등이고 소가 이등이고

순위를 매겨놓았다. 

그래봐야 약아빠진 쥐가 소 등에 타고 달리다가 결승점에서 쪼르르 달려가 일등한 것 아닌가.

그옛날 김동성이 결승점에서 스케이트 날을 쓱 디밀어 금메달을 땄듯이.

인도에도 띠를 열두동물로 나누어 나래미를 세우는지 모르겠으나

인도에서는 소가 숭배 받는 대상이다. 신성하다 여기고 노동은 전혀 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다고 신성한 소에게 먹을 것을 바치는 인간은 없는지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 소는 일은 죽어라고 해도 주인이 여물죽은 잘 준다.

평생 일만 하는 우리나라 소와 평생 놀멘놀멘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인도 소와 누가 행복한 걸까.

 

우리나라 소의 큰눈을 바라보면 슬퍼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왠지 짠해진다.

소띠인 나도 남들이 보면 슬퍼보이고 짠할까?

나도 여물죽 받아먹으며 평생 일만 하고 있다. 우리나라 소가 맞는 것 같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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