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말 [황순애]
약값이 얼마지? 내가 보낼게.
아니에요. 됐어요, 언니. 형부가 우리 아이 대부님이신데요.
그래 정말 괜찮겠니? 그럼 고맙게 받을게.
어느날 그 사촌동생이 술을 먹고 정색을 하고 전화를 했다.
언니 왜 그리 눈치가 없어요?
언니가 그동안 약값을 안 주어서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는지 알아요?
언니가 알아서 돈을 보냈어야죠.
그래 난 눈치가 없다.
그동안 약값을 몇 만 원 떼먹은 거 같다.
떼먹고 싶어서 떼먹은 게 아니라, 자꾸 괜찮다고 하길래, 하도 괜찮다고 하길래
형부가 대부님이라는 말까지 하길래
그게 진심인 줄 알고 약값을 한두 번 보내지 않은 적이 있다.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믿으면
그야말로 눈치가 무진장 없거나 염치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헛산 것 같은 생각,
갑자기 눈치없던 어린 시절까지 되돌아보게 된다.
가령 남의 집에 갔을 때 밥 먹고 가라고 한다고 정말로 밥을 먹고 온다거나
남의 집에 갔을 때 더 놀다 가라고 했다고 어슴푸레한 저녁 남의 집 따뜻한 아랫목에
마음을 데우고 있었다든가
하는 어린 시절의 눈치없음까지도 속았다는 생각,
사람의 빈말에 볼을 부비며 사는 게 아니었구나.
- 황홀한 당신, 시로 여는 세상,2013
* 대기업 총수가 임원들을 대동해서 비싼 중국집에 갔다.
-고생들 했는데 먹고 싶은 것 시키세요, 난 짜장!
임원들 고개 돌리고 우이씨! 한다.
빈말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총수보다 비싼거 시키면 총 맞는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리더가 내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해, 라고 한다고 소신껏 총질 하면 총 맞는다.
빈말을 잘 알아듣는 눈치가 있어야 한다.
아니, 빈말은 늘 뒤집어서 생각해야 한다.
그걸 잘 알면서 나도 빈말에 깜빡 속을 때가 많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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