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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가을 이야기 [조현정] 지나간 가을 이야기 [조현정] 바가지 가득 콩을 씻다가 콩 한 알 굴러떨어지니 그 한 알 주워담으려다 애꿎은 가엣것들 건드려 열 알 떨어뜨렸다 한마디 맞받아치다 걷잡을 수 없게 된 싸움처럼 네말에 내가 아픈지 알아도 내 말에 네가 아픈지는 몰라 주워담을 수도 없는 것들이 서로 잘났다고 사방팔방 튀어다녔다 놀란 천장이 한 뼘 올라가고 방바닥이 눈물을 글썽이며 꺼져갔다 너를 위하여 한 옴큼 콩 얹어 쌀을 안치는 일이 너를 위하며 사는 것보다 쉬운 일이건만 나는 자꾸만 콩을 떨어뜨렸다 한 알 주우려다 열 알 떨어뜨리고 열 알 주우려다 스무 알 떨어뜨리는 초가을 저녁 - 별다방 미쓰리, 북인, 2019 * 사는 것(LIVE)은 사랑하는 것(LOVE)과 다르지 않다. 사는 게 곧 사랑하는 것이다. 너를 위하여 콩.. 2022. 5. 28.
합창 [강성은] 합창 [강성은] 합창대회에 나갔다 관광버스를 타고 먼 도시로 갔다 하얀 블라우스와 빨간 스커트를 입고 목에는 나비넥타이 를 맸다 지휘자 선생님은 오지 않았다 선생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대신 오늘은 할아버지 교감 선생님이 지휘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휘자 선생님은 지금 슬픔에 잠겨 있다고 했다 우리가 선생님의 슬픔을 위로해주어야 한다고 꼭 상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선생님은 지금 울고 계시겠지 울고 있을 선생님을 생각하다가 한 명이 울음을 터뜨리자 곧 모두가 흐느껴 울었다 우리는 나뭇잎 배를 불 렀다 선생님을 위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울음이 그치 지 않았다 노래하며 울며 토했다 너무 슬펐기 때문인지 멀 미를 한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상을 받지 못했고 돌 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울었다 울다가.. 2022. 5. 28.
빗장 [이은규] 빗장 [이은규] 문을 활짝 여시오 꼭 닫으시오 문을 마음이라는 무한한 원을 어떻게 열고 닫을까 빗장뼈의 어원은 작은 열쇠 무른 태아에게서 가장 먼저 솟아나 어른이 될 때까지 점점 단단해진다는 뼈 날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기억처럼 멀리서 가까이서 누군가의 목소리 마음의 빗장을 열어라 닫아라 세상 모든 빗장이 열리는 절기, 봄 만화방창 만화방창 열어라 닫아라 기억의 빗장을 어떤 포옹은 꽃그늘 아래서의 전쟁 보이는 분홍과 안 보이는 분홍을 다투는 사이 문장이 되기 전 흩어져버릴 숨결들을 뼈에 새기다, 꽃잎처럼 무르고 단단한 문득 한 사람이 꽃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했을까 다만 한 사람이 아름다운 꽃들에 대해 말했을까 우리 이제 하나의 이름으로 묶일 수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으며 믿지 않으며 순리대로, 네 음.. 2022. 5. 28.
닮 [윤의섭] 닮 [윤의섭] 어느 화랑에 걸린 우울한 초상을 닮은 달 지는 햇살에 눈을 찡그린 오래된 사진의 표정을 닮은 달 몇 년 전에 똑같은 얘기를 나눈 것 같았는데 이 카페는 오늘 처음 와 본 곳이다 마주 보고 앉았지만 마주 대한 건 내심이었다 창밖으로 문득 내 뒷모습이 지나간 듯했다 우리는 지나온 날의 모든 순간을 닮아 있다고 하마터면 소리 지를 뻔했다 과연 공포를 닮았다는 건가 테이블마다 놓인 냅킨 한결같은 메뉴 모태가 같은 머그 컵 모두 비슷하길 마다하지 않는데 다르다면 처음부터 달랐다면 이란성 달이었을 것이다 서로 따로 바라보고 있는 착각 의 달 아이스크림엔 소금도 들어간대요 더 달라고 정말 달아져요 정반대 맛인데 단맛을 닮은 거겠죠 완벽히 달라야 닮아 갈 게 많은 거니까 커피에 비친 두 개의 달을 한 모.. 2022. 5.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