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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값 [문태준] 밥값 [문태준] 허름한 식당에서 국밥을 한술 막 뜨고 있을 때 그이가 들 어섰다 나는 그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수레에 빈 병과 폐지 등속을 싣고 절룩거리며 오는 그이를 늦은 밤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이는 식당 한편 벽에 걸린 달력의 28일을 오른손으로 연거푸 짚어 보였다 무슨 말인가를 크게 했으나 나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 었다 식당의 여주인은 조금도 언짢아하는 기색이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짧은 시간 후에 그이의 앞에 따뜻한 밥상이 왔다 - 아침은 생각한다, 창비, 2022 * 빈 병과 폐지를 모아 팔아봐야 몇천원일텐데 사실 한끼를 사먹기도 버거운 편이다. 28일엔 한달치 수고비를 받는 날인가 싶다. 자신있게 큰 소리 치는 건 28일엔 외상값을 갚겠다는 뜻이겠다. 여주인이 긍정적으로 끄.. 2022. 6. 6.
구부러지는 것들 [박용하] 구부러지는 것들 [박용하] 어깨가 구부러진 청솔들에게도 한때 빛나는 유년이 있 었으리라 보기보담 일찍 구부러진 공원의 낙엽들을 나는 좋아한다 구부러지는 식물들 그것은 윤회를 닮아 있다 강물은 오늘도 무서운 속도로 상류의 물들을 하류로 실어 나르고 둔덕의 풀꽃들은 그림자 길게 휘어 달빛을 잡는다 그리고 나는 세상을 휘휘 젓는 직선에 괴로워한다 등이 구부러진 과일들 등이 구부러진 노인들 등이 구부러진 황소 야! 아예 온몸이 구부러짐의 시작의 끝인 시작의 둥근 공과도 같은 하루는 있는 것일까 구부러지다 바로 서고 바로 서다 구부러지는 풀 나는 그 풀들의 유연성을 삶이라는 이름으로 곰곰 되뇌 어본다 구부러지는 것들은 자연의 숨통을 닮아 있다 흘러가는 강의 휘어짐 세상에서 세상 밖으로 이어진 길들 한사람에게만 마.. 2022. 6. 5.
1995년 여름 [최지인] 1995년 여름 [최지인] 이놈의 집구석 넌더리가 난다고 했던 주말 오후에는 소면 삶고 신 김치 잘게 썰어 양념장에 비벼 먹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끝나기만 기다렸다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귀를 막았다 어머니는 멍든 눈으로 부서진 가구를 밖에 내놓고 금이 간 유리창에 셀로판테이프를 붙였다 출근하지 않고 틀어박혔다 문을 두드려도 기척이 없었다 나는 동급생들과 아파트 단지를 뛰어다녔다 자전거를 훔 쳐 타고 슬프다 슬펐다 언덕을 오르내렸다 가장 먼 곳을 향 해 페달을 쉬지 않고 밟았다 옳다고 믿었던 건 옳지 않은 것 뿐이었다 슬픈 마음이 안 슬픈 마음이 될 때까지 나는 슬플 때마다 슬프다고 말했다 여성복 점원이 엄마야? 하고 물을 때 누나예요 하고 답하면 어머니가 생긋 웃었다 강 너머에.. 2022. 6. 4.
동화사에서 [조용미] 동화사에서 [조용미] 먹구름을 따라 불길하게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까마귀떼, 비 온 뒤 팔공산 전체를 온통 뒤덮고 있다 수만 장의 종이를 태워 재를 하늘로 날린 듯 새까맣게, 꼬불꼬불한 산길 따라 무작정 숲속을 파헤치며 오르는데 으악으악 음산하고 적막하게 머리 위를 선회하며 악동처럼 울어댄다 산중턱에 오르자 매섭게 얼굴을 후려치며 나뭇가지에 맺힌 빗방울들을 투두두둑 떨어뜨리고 가는 차고 거센 바람, 바람이 거칠어지는 만큼 나의 호흡은 깊어지고, 소나무가 많아 겨울 산은 푸른데 붉은 솔가지며 떨어진 나뭇잎들 발길마다 수북수북 쌓여 있어 산은 속이 깊을수록 가을이다 대나무 숲으로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동화사 뒤켠 산언덕에 빽빽하게 들어찬 짙은 초록의 장막, 그 속에 휘어진 대나무라니 (휘어질 줄 아는 저.. 2022. 5.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