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가을 이야기 [조현정]
바가지 가득 콩을 씻다가
콩 한 알 굴러떨어지니
그 한 알 주워담으려다
애꿎은 가엣것들 건드려 열 알 떨어뜨렸다
한마디 맞받아치다 걷잡을 수 없게 된 싸움처럼
네말에 내가 아픈지 알아도
내 말에 네가 아픈지는 몰라
주워담을 수도 없는 것들이
서로 잘났다고 사방팔방 튀어다녔다
놀란 천장이 한 뼘 올라가고
방바닥이 눈물을 글썽이며 꺼져갔다
너를 위하여
한 옴큼 콩 얹어 쌀을 안치는 일이
너를 위하며 사는 것보다 쉬운 일이건만
나는 자꾸만 콩을 떨어뜨렸다
한 알 주우려다 열 알 떨어뜨리고
열 알 주우려다 스무 알 떨어뜨리는
초가을 저녁
- 별다방 미쓰리, 북인, 2019
* 사는 것(LIVE)은 사랑하는 것(LOVE)과 다르지 않다.
사는 게 곧 사랑하는 것이다.
너를 위하여 콩 얹어 쌀을 안치는 일은 너를 위하며 사는 것과 같은 거다.
어느 게 더 크고 더 작고,가 없다는 말이다.
살면서, 사랑하면서 내뱉는 말은 내뱉는 순간 주워담을 수 없는 콩알과 같다.
잘났다고 내뱉으면 사방팔방이 시끄럽게 될 수밖에 없다.
말 한마디도 진중하고 진실한 마음이 담겨야 한다.
하필 쌀쌀해지는 가을, 그것도 저녁에 콩을 떨어뜨린다냐.
따뜻한 콩밥 먹고 우윳빛 숭늉 마시며 떨어졌던 콩 한 알이라도 주워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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