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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고명재] 바이킹 [고명재] 선장은 낡은 군복을 입고 담배를 문 채로 그냥 대충 타면 된다고 했다 두려운 게 없으면 함부로 대한다 망해가는 유원지는 이제 될 대로 되라고 배를 하늘 끝까지 밀어 올렸다 모터 소리와 함께 턱이 산에 걸렸다 쏠린 피가 뒤통수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원래는 저기 저쪽 해 좀 보라고 여유 있는 척 좋아한다고 외치려 했는데 으어어억 하는 사이 귀가 펄럭거리고 너는 미역 같은 머리칼을 얼굴에 감은 채 하늘 위에 뻣뻣하게 걸려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포가 되었다 나는 침을 흘리며 쇠 봉을 잡고 울부짖었고 너는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보면서 무슨 대다라니경 같은 걸 외고 있었다 삐걱대는 뱃머리 양쪽에서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부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갈 때 너는 민들레처럼 머리칼을 펼치며 날아가 .. 2022. 5. 10.
푸른 옷의 여인 [강신애] 푸른 옷의 여인 [강신애] ​ ​ ​ 창가 햇빛에 불거진 힘줄은 두 손으로 받친 편지 한 장의 무게를 짐작케 한다 팽팽한 이마 반쯤 벌어진 입 홍조 띤 뺨 너머 벽에 걸린 세계지도는 그녀를 먼 나라로 데려간다 등받이 높은 감색 의자 앞에 아득히 서서 의자를 장식한 금빛 테두리는 고요를 못 박고 그녀는 어떤 고백에 못 박혀 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처럼 혼을 빠트린 채 어떤 편지를 읽은 적 있다 편지를 읽고 쓰는 것은 나의 재능이기도 해서 숲에다 뿌린 오디 같은 글씨들이 많다 흙 속에서 소곤소곤 밀고 올라오는 귀엣말이 많다 우리는 시간 방향으로 빛의 속도로 이동 중이라고 한다 애착도 은유도 없는 메일과 문자들 삭제하고 삭제하며 신기루가 사라진 곳에 빛의 빙하기는 어떻게 당도하는.. 2022. 5. 10.
천돌이라는 곳 [정끝별] 천돌이라는 곳 [정끝별] 목울대 밑 우묵한 곳 그곳이 천돌 쇄골과 쇄골 사이 뼈의 지적도에도 없는 물집에 싸인 심장이 노래하는 숨 자리 목줄이 기억하는 고백의 낭떠러지 와요 와서 읽어주세요 긴 손가락으로 아무나가 누구인지 모든 게 무엇인지 숨겨둔 술통이 익을 즈음이면 숨들이 밤으로 스며들고 혼잣말하는 발자국이 하나둘 늘어나요 어떤 여름은 파고 또 파고 어떤 이름은 묻고 또 묻고 애초 에 없었던 어떤 이름은 그냥 밟히기도 하고 박힌 희망에 호미 자루가 먼저 달아나기도 하는데요 그 럴 때면 눈물의 밀사가 관장하는 물시계 홈통에 물 떨어지는 소리 와요 어서 와서 대주세요 긴 손가락의 지문으로 지도에도 없는 천 개의 돌을 열어주세요 발소리도 없이 들었다 잠시 별을 피워낸 서리 입김 유리컵처럼 내던져진 너라는 파.. 2022. 5. 10.
분홍 코끼리에게 [이은규] 분홍 코끼리에게 [이은규] 수천 장 꽃잎을 녹여 빚은 듯 향기로운 살결을 가졌구나 쓰다듬는 손끝에 금세라도 물들 것처럼, 오래전 일을 기억 하니 달아나지 못하게 발목에 채워놓은 쇠고리가 많이 무 거웠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어린, 여린 발목이 부어오르곤 했지 그렇게 말뚝에 발목이 묶여 둥글게 원을 그리는 날들 이었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천국, 밤이면 먼 데 향해 분홍분홍 울지 않았니 이를 앙다물수록 새어나오는 그 소리 아득했겠구나 그리움처럼 무럭무럭 자라 말뚝을 뽑아 버릴 만큼 힘이 세졌지 안타까운 건 그후에도 계속 같은 자 리를 맴돌았다는 기록 혹은 기억, 끊임없이 원을 그리며 돌 게끔 누군가 주술을 걸었나 걸지 않았나, 오래된 기억과 결 별하기 좋은 날 처음부터 없었던 쇠고리를 만들어낸 믿음.. 2022.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