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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분홍 코끼리에게 [이은규]

by joofe 2022. 5. 10.

 

 

 

 

 

분홍 코끼리에게 [이은규]

 


 

 

 

 

  수천 장 꽃잎을 녹여 빚은 듯 향기로운 살결을 가졌구나

쓰다듬는 손끝에 금세라도 물들 것처럼, 오래전 일을 기억

하니 달아나지 못하게 발목에 채워놓은 쇠고리가 많이 무

거웠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어린, 여린 발목이 부어오르곤

했지 그렇게 말뚝에 발목이 묶여 둥글게 원을 그리는 날들

이었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천국, 밤이면 먼 데

향해 분홍분홍 울지 않았니 이를 앙다물수록 새어나오는 그

소리 아득했겠구나 그리움처럼 무럭무럭 자라 말뚝을 뽑아

버릴 만큼 힘이 세졌지 안타까운 건 그후에도 계속 같은 자

리를 맴돌았다는 기록 혹은 기억, 끊임없이 원을 그리며 돌

게끔 누군가 주술을 걸었나 걸지 않았나, 오래된 기억과 결

별하기 좋은 날 처음부터 없었던 쇠고리를 만들어낸 믿음

말이야 이제 거두기로 하자 내가 새로 태어났다면 모든 것

이 새로 태어났을 텐데, 라는 묘비명 따위는 쓰지 말기로 하

자 다짐하는 순간, 한줌 온기의 불씨가 살아났잖아 활활 저

만치 잘못된 천국이 불타고 있잖아 이제 아득하게 웃기로

하자 잇몸도 시리게 분홍분홍

 

                    -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문학동네, 2019

 

 

 

 

 

 

 

 

* 반려견 혹은 반려묘가 말썽을 부리면 훈련 시키는 게 있다.

이렇게 해서 말 잘 들으면 맛있는 간식을 주고

말 잘 안 들으면 맛있는 간식을 안 주는.

몇 번이고 반복하면 결국 간식때문에 말 잘 듣는다.

 

분홍분홍이 고분고분이 되는 것이 훈련때문이라면

인간도 보이지 않는 저 쇠고리 안에서 맴도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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