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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마, 우는 건 나야 [박노식] 울지 마, 우는 건 나야 [박노식] 어린 산새가 조용히 마당을 지나가는 날은 왜 하늘이 무겁고 바람이 자주 부는지 모르겠다 아직 세월이 닿지 않은 저 눈빛과 주린 배를 채우려는 저 작은 부리를 보면 나의 맑고 순한 사색도 부질없다 사평 장날, 쓸쓸히 앉아 마늘 종자를 팔던 한 소녀에게 왜 혼자 나왔느냐 물었지만, ˙ ˙ ˙ ˙ ˙ ˙ 내 눈 속에서 고개 숙인 소녀는 울먹이고 당황한 나는 속으로 말했다 "울지 마, 우는 건 나야"* * TV 인간극장에서 방송된 '봄비'의 가수 박인수의 대사 중에서 - 마음 밖의 풍경, 달아실, 2022 * 장날에 나가보면 누렇게 시든 호박잎을 파는 할머니도 있고 예쁘지 않은 풋고추를 파는 아주머니도 있다. 이것 저것 팔아주고픈 마음인데 그 옆에 소녀가 마늘 종자를 팔고 있.. 2022. 6. 23.
시는, 시를 견디라며 [박완호] 시는, 시를 견디라며 [박완호] 시는, 시를 견디라고 내게 온다. 어제의 나를 견디고 여태 짊어지고 있던 불행을 더 끌어안으라고 이런 개새끼, 귀가 다 헐도록 들어온 수모와 욕설까지 한꺼번에 나를 찾는다. 그날, 비 내리는 무심천 울먹이는 물그림자 툭하면 꺼지려 들던 불꽃의 어린 심지 앙다문 입술 사이 실금처럼 일그러지던 글자들. 시는 어떻게든 오늘을 버텨내라며 어제처럼 나를 일으켜 세운다. 온 힘을 다해 지평선을 밀어버리려는 사내*를 보라며 경계에 설 때마다 머뭇거리는 나를 싸움판으로 떠밀어댄다. * 유홍준 詩, 「지평선」 - 문득 세상 전부가 되는 누군가처럼, 북인, 2022 * 詩를 한자로 풀이하자면 사원에 가서 말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원에는 절대자, 신이 있고 인간은 그 앞에 서서 자기.. 2022. 6. 18.
흘려 쓰다 [박완호] 흘려 쓰다 [박완호] 끝과 처음사이에서 자주 길을 잃는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다 입구 같고 출구 같지만 어느 것도 아니었던 항문과 입이 한 덩어리인 길들의 변덕 또는 능청. 해면에 흘려 쓴 글씨처럼 일그러지는 서로 겹치며 비껴간 발자국들. 마지막이라고 느낀 자리가 처음 그곳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길에서 막 나왔는데 또 길 위에 서 있는 나. 어디에나 서 있는 내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 문득 세상 전부가 되는 누군가처럼, 북인, 2022 * 끝과 처음 사이에서 방황한다는 건 끝까지 가보았는데 길을 잃었다고 깨달은 것이다. 처음의 초심을 처음부터 잃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시종일관이란 말도 있고 철두철미라는 말도 있다. 그러기가 쉽지 않기에 사자성어로 초심을 지키게 하는 것일 게다. 세상의 .. 2022. 6. 16.
금지된 삶 [김호성] 금지된 삶 [김호성] 문고리를 돌린다 화분에는 물이 말랐고 남은 이파리는 밖을 향해 눕는데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가 같이 죽을 사람 하나 없는 나는 미궁으로 간다 식은 난로 아래 잿더미는 본 적 없는 그림자를 화사하게 치장한다 간절하고 용서받고픈 자들의 적 그 앞에서 나는 절대 지치지 않는다 칼을 들어 고개 숙인 영혼들의 어깨를 찌르면 그들은 몇 가지 제목을 발설하고 나를 추종하게 된다 원망하는 일은 한여름 도시처럼 질겨 폐가 망가진 시인도 담요를 뒤집어쓰고 웅크린다 책장이 솟아오르고 수돗물이 쏟아지는 귀 아픈 소리도 흥얼거리는 자장가로 변한다 살인자의 왕인 그림자에게서 위로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거울을 간직하고 있기에 깨어나면서 평온을 느끼지 못하는 물건이 더 나은 육체를 바라는 일이 정말 부질없는지를.. 2022. 6.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