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은 내 혀에 내려앉아라 [신미나]
오늘은 날이 좋다 좋은 날이야 손을 꼭 잡고 베개를 사러 가자 원앙이나 수壽자를 색실로 수놓은 것을 살 수 있겠지
이것은 흐뭇한 꿈의 모양, 어쩐지 슬프고 다정한 미래
양쪽 옆구리에 베개를 끼고 걸으면, 열두 폭의 치마를 환하게 펼쳐서 밤을 줍는 꿈을 꾸겠네
목화꽃 송이, 송이 세 송이 콧등을 스치며 높은 곳에서 하나씩 떨어지는 모양을 바라보아도 좋겠네
너와 나, 꿈길의 먼 이부자리까지 솜을 틀자 이불이 짧아 드러난 발목을 다 덮지 못해도
꿈속에서는 미래의 지붕까지 덮고도 남겠지
오늘은 날이 좋다 좋은 날이야 철 지난 이불은 개켜 두고
일단 종로로 가자
종로에 가서 베개를 사자
-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창비, 2021
* 어릴 때, 우리집은 솜틀집을 했다.
요와 이불을 오래 쓰면 솜을 틀곤 했었다.
솜을 틀면 몽글몽글한 솜이 뭉쳐있다가 풀풀 날리듯 눈발이 된다.
새로 태어난 솜털이 눈처럼, 첫눈 아닌 첫눈처럼 내릴 때
눈에도 내려앉고 혀에도 내려앉았을 것이다.
어린 날의 추억도 이젠 첫눈 같은 기억으로만 존재하지만 아쉽게도
아마도 요즘은 두툼한 요와 이불은 없어서 솜틀집도 없어졌을 것이다.
아주 시골에나 가면 그런 요와 이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동나무로 만든 이불장에 얌전히 개켜놓았다가 출가한 아들,딸들이 오면 내줄 것이다.
두툼한 요와 이불을 내주는 날은 참 좋은 날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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