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는 생각한다 [신철규]
의자는 생각하는 사람처럼 앉아 있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수평선이 그려진 그림을 바라보며
구름이 왼쪽 귀로 들어와 오른쪽 귀로 빠져나간다
다정한 연인처럼
창에 비친 서로를 바라보며 낡아가고 있다
삶의 절반 동안 기억해야 할 일들을 만들고
나머지 절반 동안은 그 기억을 허무는 데 바쳐진다
아무도 모르고 지나친 생일을 뒤늦게 깨닫고는 다음해의 달력을 뒤적거린다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툭 치고
이제 문 닫을 시간입니다, 라고 말해주기만 기다리고 있다
금방이라도 무릎을 짚고 일어설 것처럼
의자 위에 물음표 하나가 앉아 있다
구름의 초대장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문학동네, 2017
* 학교 다닐 때도 늘 앉던 의자가 있었다.
가을날 그 나무의자에 앉아있으면 플라타너스 잎사귀들이 종교적인 감동처럼 춤 추곤 하였지.
가끔 대청호를 가면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하는 식당 앞에 호수를 바라보기 좋은 위치에 나무의자들이 놓여있다.
수심 한가운데 솟아오른 한그루의 나무를 바라보며 앉아있으면 생각이 그 나무의 뿌리로 들어간다.
하염없이 앉아서 의자의 일부가 될 때가 참 좋다.
무념무상의 시간이 좋다는 얘기다.
찰랑거리는 물과 반짝이는 윤슬이 생각을 내려놓게 하는 의자를 만든다.
어디에든 의자가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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