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와 감상

종이접기 [최금진]

by joofe 2021. 10. 5.

종이접기 [최금진]

 

 

 

​  

 

이 길에는 순서와 법칙이 있어요

나중에 당신은 종이 속에 감춰진 무수한 길들을 이해하게 되죠

백지가 숨겨놓은 진실을요

집중력을 발휘할 때만 나무와 숲이 보여요

나무와 숲은 종이들의 영혼이 묻힌 곳이죠

종이를 접으면

지구에서 달까지 이르는 거리를 당신 손에 갖게 되죠

우리가 길을 벗어나 형상에 이르는 유일한 순간입니다

우리의 뇌는 활짝 열려 선분과 선분으로 이어지고

완성품은 아니지만

비로소 달을 보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생기는 거죠

외울 필요 없어요, 종이가 제 몸을 펼쳐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길을 잃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건 당신이 가보지 않은 더 많은 길이

종이 안에 묻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무와 숲에 눈이 내리면 백지의 들판이 펼쳐지고

세상에서 가장 긴 연필로 편지를 써가는 흰 자작나무도 있어요

, 보이죠, 쉽고 작은 것에서 나온 길 하나가

온몸으로 눈밭을 뚫고 지나가고 있어요

이런 식으로 오늘 밤 창문을 열고

우리는 달까지 갈 수 있어요, 자 이쪽 면을 접고

반대쪽은 활짝 펼쳐 보세요

, , 맞아요, 거기가 바로 종이의 심장입니다

 

               - 현대시학 2021년 7~8월호

 

 

 

 

 

* 국민학교 다니던 때는 종이비행기와 종이배 정도는 접을 줄 알았다.

지금은 수십년이 지나 접는 방법을 잊어버려 접을 수가 없게 되었다.

종이비행기를 접어 멀리 보내기를 하거나

종이배를 접어 개미를 실어 도랑물에 띄워보낸 어린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종이는 그냥 A4용지일 뿐이다.

삼남매 중에 둘째가 아들인데 초딩일 때 종이를 잘 접었다.

기린도 접고 코끼리도 접고 고난이도의 종이를 책도 없이 척척 접었다.

도대체 몇번을 접어봐야 접는 순서를 다 알고 접을 수 있었을까.

지금은 사회인인데 지금도 사슴벌레 접어보라면 접을 수 있을까?

이번 주에 집에 오면 물어봐야겠다.

접을 수 있는 게 있는지.

아직도 잘 접는다면 2세를 낳게 되었을 때 멋진 아빠가 될 수도 있겠다.

우주선을 접어 달나라도 가고 명왕성도 가는, 꿈이 가득한 가족이 될 터이다.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주 틀리는 맞춤법 [한연희]  (0) 2021.10.05
아름다운 관계 [박남준]  (0) 2021.10.05
'밥을 딴다'라는 말 [문성해]연밥  (0) 2021.10.04
발치(拔齒) [이문재]  (0) 2021.10.04
적 [임희구]  (0) 2021.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