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자 [이병률]
마취 시킨 다음 통 말을 듣지 않게 될
나를 데리고 가서
사흘동안 눈 속에 갇힌 사람처럼
그렇게 있다가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자
이번 생의 등판번호가
45라 하더라도
이번 생의 번호가
11b라 하더라도
영원히 지휘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원래 손상되거나 훼손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니
반드시 사라지자
아무리 이 삶이 틀렸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라질 때 열쇠 하나를 숨기고
그 또한 의미가 될 거라는 순리를 기억할 것
그리고 내 열쇠는 누가 줍게 되는지 염두에 둘 것
압축되어 당당히 사라지자
당신도 원래 바다였다
당신이 어떤 세월에 휩쓸리다 살 곳을 정했다고
흐르지 않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마라
모든 산은 바다였다
산의 정상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된다고
누군가 가져와 흘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 수술환자, 특히 중환자실에서 지내본 사람은 퍽 공감할 것이다.
수술 후에 깨어날 것인가 그냥 갈 길을 갈 것인가 고민하면서
마취에 스르르 잠들어버릴 것이다.
죽으면 그야말로 한 줌의 흙이 되어 어딘가에 뿌려질 삶이니
결국 압축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원래가 바다였다니 흘러 흘러 바다로 돌아간다면
본향으로 가는 거겠다.
아직 살아있는 나는 갑자기!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진다.
(사라지자니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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