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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사라지자 [이병률]

by joofe 2022. 2. 1.

마리 로랑생 그림

 

 

사라지자 [이병률]

 

 

 

 

마취 시킨 다음 통 말을 듣지 않게 될

나를 데리고 가서

사흘동안 눈 속에 갇힌 사람처럼

그렇게 있다가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자

 

이번 생의 등판번호가

45라 하더라도

이번 생의 번호가

11b라 하더라도

영원히 지휘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원래 손상되거나 훼손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니

반드시 사라지자

 

아무리 이 삶이 틀렸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라질 때 열쇠 하나를 숨기고

그 또한 의미가 될 거라는 순리를 기억할 것

그리고 내 열쇠는 누가 줍게 되는지 염두에 둘 것

 

압축되어 당당히 사라지자

 

당신도 원래 바다였다

당신이 어떤 세월에 휩쓸리다 살 곳을 정했다고

흐르지 않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마라

 

모든 산은 바다였다

산의 정상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된다고

누군가 가져와 흘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 수술환자, 특히 중환자실에서 지내본 사람은 퍽 공감할 것이다.

수술 후에 깨어날 것인가 그냥 갈 길을 갈 것인가 고민하면서

마취에 스르르 잠들어버릴 것이다.

죽으면 그야말로 한 줌의 흙이 되어 어딘가에 뿌려질 삶이니

결국 압축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원래가 바다였다니 흘러 흘러 바다로 돌아간다면

본향으로 가는 거겠다.

아직 살아있는 나는 갑자기!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진다.

(사라지자니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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