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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차경借景 [박주하]

by joofe 2022. 2. 18.

낮달-외가가는 길 노명희화가 그림

 

차경借景 [박주하]

 

 

 

 

마디 굵은 저 나무는

맞지도 않는 신발을 신고 있으나

너른 들판에 선 듯 튼실해 보이지요

정원의 흙이 내심 속속들이

뿌리에 깊이 연루되어버린 곡절이랄까

뿌리가 흙인지

흙이 뿌리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운 세월이

허공으로 줄창 뻗어 나가

새들을 부르고 있으니

생은, 서로의 풍경을 앙물고 숨 쉬는 것

 

그대는 내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빌어온 가을 풍경이었나 봅니다

휘어지기 위하여 속을 비운 갈대를

꺾어놓고 외면했던

피가 돌지 않는 사연이랄까

내가 그대인지

그대가 나인지 헤아리기 분주했던

숨 막히는 그늘 속에선 아직도

저수지의 시간들이

처절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차가워진 저녁의 몸으로는

차마 그대를 안을 수 없었습니다

 

- 숨은 연못, 세계사, 2008

 

 

 

 

 

 

* 생은, 서로의 풍경을 앙물고 숨 쉬는 것.

나도 누군가에게는 풍경이 되고 있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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