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참전 [권현형]
도화지는 마음을 좀처럼 열지 않는다
무거운 잠수종(潛水鐘) 눈꺼풀을 열기 위해
기다린다 상처 주지 않고 공격하지 않고
그동안 흰 도화지 속엔 함박눈이 내리고
갇혀 있던 조랑말들이 신나게 돌아다닌다
바람을 넣은 빈대떡, 차가운 유리컵, 할아버지가 끼던
돋보기의 쓸쓸함이 가슴께로 천천히 머리를 기대온다
그가 입고 있던 티셔츠의 파랑이 도화지에 스며든다
그림 속 사람들은 귀가 크다 도화지의 말을 듣기 위해
1987년생 화가 김태호의 귀는 보리처럼 자란다
느리게 가까스로 고백한 도화지의 속말을
아끼지만 다시 파란 물감 속에
보석을 파묻는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도화지와
태호는 서로의 고통에 참전º하고 있다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지만 너무 느려서
태호는 도화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º 심리학자 정혜신은 타인의 고통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공감하는 과정을 '심리적 참전'이라고 표현했다.
- 포옹의 방식, 문예중앙, 2013
*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는 것이 심리적 참전이겠지만
그림이나 음악, 운동, 독서, 바둑 등등 마음을 기울이는 것에도 자신의 고통을 투사해서
공감 내지는 교감을 통해 '스며든다'라고 할까, 심리적 참전을 하게 된다.
1987년생 화가가 실제 인물인지는 모르겠으나 귀를 크게 그렸다니
누군가와 대화가 잘 안되어서 잘 듣고 싶거나 잘 들어달라는 마음을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살면서 누군가가 나에 대한 참전이 많으면 많을 수록 외롭지 않은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도화지도 나를 위해 참전해 주는데 가족이나 친구들의 참전이 아주 많으면 더 행복한 삶이라고 하겠다.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아무도 참전해 주지 않는데 홀로 외로이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두드리면서
음악의 참전을 통해 위안을 받으며 끝내는 오디션을 통과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주변에 누군가가 고통을 안고 살아가거든 참전해 보시라. 스며들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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