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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귀는 소리로 운다 [천양희]

by joofe 2021. 10. 7.

아들이 어렸을 땐 이구아나 먹이로 귀뚜라미를 키웠었다. 한마리 백원.(사진은 업어온 사진)

 

 

귀는 소리로 운다 [천양희]

 

 

 

 

귀뚜라미 소리가

귀 뚫어, 귀 뚫어 우는 것 같다

그동안 내가

귀를 닫고 산 까닭이다

 

내가 나를 견디는 동안

눈을 닦고 보아도 산빛은 어둡고

강물은 먼 데로만 흘러가

꽃 지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소리는 비명 같아

귀에 한 세상 넣어주는 소리만이

침묵을 대신하는 유일한 문장이라고 쓰고는 하였다

 

어디서 오는 소리든

슬픈 소리는 눈으로 듣고

귀는 소리로 운다고

귀 뚫은 듯 귀 뚫은 듯

이렇게 자꾸 귀 기울여보는 것인데

 

나는 이제

다른 소리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게 되었다

 

귀는 소리로 운다

 

         - 지독히 다행한, 창비, 2021

 

 

 

 

 

 

 

 

* 보는 것도 많고 보이는 것도 많고 많은 세상.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도 엄청 많고 크고 잡스럽고 탈도 많은 소리들을 듣는다.

그 얘기는 터진 입술로 온갖 쓸모없는 말잔치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정도를 걷는 사람들은 말이 많지 않다.

입술로 말하는 것을 세번 생각하고 신중하게 내뱉는다는 것이다.

귀를 뚫는다는 것은 선별해서 분별해서 듣는다는 의미일 게다.

우리는 언제부터 흉악한 막말을 쏟아내기 시작했을까.

막말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것이 옳으니, 저것이 옳으니 따지는데 

그게 귀청 따가운 소리가 되고 이쯤 되면 진짜 조용한 산사에나 가서 돌계단에 앉아 

귀뚜라미 소리나 새소리나 냇물 흘러가는 소리를 듣고싶은 것이다.

자연의 소리가 귀 막아 귀 막아, 입 다물어 입 다물어, 눈 감아 눈 감아

그렇게 울고 있을 테다.

 

가을이 왔다고 귀뚜라미가 이어폰을 주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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