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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이 세계 [김행숙]

by joofe 2021. 10. 8.

연잎성게

 

이 세계 [김행숙]

 

 

 

 

  이것을 이 상자에 넣었으므로 저쪽 상자엔 넣을 수 없지*

 

  이것이 네 신발이야

  걷고 뛰어라, 상자가 충분히 커다랗다면 저쪽 세계를 

기웃거릴 이유가 없지

  쫓아가는 경찰도

  쫓기는 도둑도 모두 죽어라 뛰어간다

  상자를 살짝 흔들면 경찰이 쫓기고 도둑이 죽어라 쫓

아간다, 옷만 바꿔 입었을 뿐인데

  밤이 오면 너는 신발을 성경책처럼 가슴에 품고 잠이

드네

  내 아기, 세상모르게 잘 자라, 모든 강물이 다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넘치는 일이 없단다**

  나는 신발 공장의 일개 노동자

  새 신발을 새 상자에 넣는 일을 한다네

  상자 속에, 상자 속에, 상자 속에, 상자 속에······ 하, 이

것은 끝이 없네

  이것이 깊고 깊은 어둠이야

  어둠 속으로

  손을 넣어 잘 찾아봐, 이것이 네 신발이야

 

* 황 정은 「디디의 우산」 창비 2019 p.21

** 「전도서」 1:7

 

          -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문학과지성사, 2020

 

 

 

 

 

 

 

* 미국 해안에 커다란 개복치가 몰려와 죽었다고 하고

뒤를 이어 바닷속 바닥에 사는 연잎성게가 수천 마리 떠내려와 해안에서 말라죽었다고 한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옮겨간 것이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탈레반으로부터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하루아침에 미군은 다 도망가버리고 탈레반이 정부를 이어받아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 혼란에 빠지고,

해가 늘 동쪽에서 뜬다고 믿고 살았지만 내일 당장 서쪽에서 해가 뜰 수도 있는 법.

바다는 넘치는 일이 없잖아!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당장 부산과 경남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고 호들갑이잖아.

이 세계가 저 세계가 될 수 있는 이 개연성을 안 믿는다구?

지금의 이 세계가 저 세계로 돌변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남방의 모기는 점점 북상하고 바다 수온은 계속 오르고 북극 빙하는 녹아 사라지고

징후는 뚜렷한데 우리는 플라스틱가루를 퍼먹은 물고기들을 계속 먹고 산다.

아가야, 바닷물이 넘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란다.

새 신발에 욕심내지 말고 신었던 신발, 마르고 닳도록 신거라.

그게 이 지구를 지키는 일이란다.

깨어 있으란 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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