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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뿌옇게, 또렷하게 [한영옥]

by joofe 2022. 5. 10.

 

 

 

 

 

뿌옇게, 또렷하게 [한영옥]

 

 

 

 

 

벌써 다시 초겨울인 모양인데

어제 일도 전생인 듯 뿌옇게 뭉글거리는 통에

이생의 뭉뚝한 손바닥을 벽에다 문지르다

바닥에다 문지르다 마른가슴에다 거칠게 문지르네

울컥하게 받아치며 쏟아지는 것, 생각지도 않게

보들보들한 기억 무더기가 푸짐하네

찬찬히 목도리로 둘러보니 따스하게 몇 겹이네

손잡아주던 이들이 웬만큼은 있었다는 것이네

말할 것도 없이 또렷한 당신이 제일 고맙네

벌써 다시 초겨울인 모양인데

모진 눈보라 속으로 내몰았던, 알게 모르게

내몰았던 이들이 뿌옇게 번져오네

말할 것도 없이 당신은 또 또렷해지네

내생으로 늦은 눈물 굽이쳐 흘러가기 전

당신에게 조복(調伏)해야 할 도리, 빳빳하게 두르고

모진 겨울 터널, 두려움 버리고 뚫어가겠네

 

                      -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 문학동네, 2018

 

 

 

 

 

 

 

 

* 날이 추워지면 따뜻함이 제일이다.

목도리 둘러주고 장갑 챙겨주는 가족의 따스함만큼이나

추울 때 사랑이 더욱 또렷해진다.

따뜻하게 손잡아주던 이들이 웬만큼은 있었다는 건 그만큼 잘 살았다는 거다.

하지만 모진 겨울 터널을 지날 땐 뿌옇게 되는 사랑과 또렷한 사랑은 분별이 된다.

또렷해지는 당신 덕에 내가 산다면 마음은 평안, 그 자체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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