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옷의 여인 [강신애]
창가 햇빛에 불거진 힘줄은
두 손으로 받친
편지 한 장의 무게를 짐작케 한다
팽팽한 이마
반쯤 벌어진 입
홍조 띤 뺨 너머
벽에 걸린 세계지도는
그녀를 먼 나라로 데려간다
등받이 높은 감색 의자 앞에 아득히 서서
의자를 장식한 금빛 테두리는
고요를 못 박고 그녀는
어떤 고백에 못 박혀 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처럼
혼을 빠트린 채
어떤 편지를 읽은 적 있다
편지를 읽고 쓰는 것은 나의 재능이기도 해서
숲에다 뿌린 오디 같은 글씨들이 많다
흙 속에서 소곤소곤
밀고 올라오는 귀엣말이 많다
우리는 시간 방향으로
빛의 속도로 이동 중이라고 한다
애착도 은유도 없는 메일과 문자들
삭제하고 삭제하며
신기루가 사라진 곳에 빛의 빙하기는 어떻게 당도하는가
뜨거운 종이 한 장에 멈춘 숨
서늘한 무아지경이
소리로 가득 찬 액정의 도시로 건너온다
- 웹진 『시인광장』 2020년 1월호 발표
* 편지를 읽고 쓰는 것은 재능이 틀림없을 게다.
편지는 배달되는 동안 숙성이 되어 깊은 감동과 진실함이 느껴진다.
요즘처럼 카톡으로 가볍게 깨톡깨톡 전달되지 않았다.
세월이 너무 빨리 변해버려 우편물이 와도 가슴 뛰는 일은 없다.
사무적이고 행정적인 우편물이 전부인 까닭이다.
하긴 전화기를 통해 전화하는 일도 사라진지 오래다.
뭐든지 스마트폰으로 해결하니 손 안에서 모든 게 다 이루어진다만,
숙성된 건 아니라 그만큼 무아지경의 표정으로 문자를 들여다보지 않게 된다.
일상이 된 일상속에서 손편지를 받는다면 푸른 옷을 입은 여인처럼 혼을 빠뜨릴 텐데......
주소 알려줄까?
편지도 오는군 받으면 기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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