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들여다본다 [채호기]
마음을 들여다본다.
눈으로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니
발을 내밀어 디뎌본다.
그런데 너를 이렇게 들여다보는 것을
누가 보지 않을까?
길 아닌 곳으로 방향을 잡아
파고든다. 풀숲을 헤쳐 나간다.
나무 뒤에도 숨고 두리번 거리며
주위를 살피고 멀리 내다본다.
마음을 밟고 있는 몸 끝으로
삶의 비밀보다 더 깊은 곳에서
끄집어 낸 것들을 떨어뜨린다.
너는 중얼거림 속에서 자기 자신이 되어 깨어난다.
- 검은 사슴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 문학동네, 2019
서곡(序曲)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진눈깨비 속에서 옆으로 질질 발을 끌며 다가오는 그 무엇에 나
는 멈칫한다.
다가올 일의 단편.
허물어지는 벽. 눈 없는 그 무엇. 단단한.
이빨의 얼굴!
홀로인 벽. 아니면 집인가,
내가 볼 수 없어도?
미래. 일군(一群)의 빈집들,
눈을 맞으며 앞으로 길을 더듬어 나가는.
2
두 가지 진실이 서로 접근한다. 하나는 내부에서 하나는 외부에서.
두 진실이 만나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기회를 갖는다.
일어날 일을 아는 사람이 격렬하게 외친다. '멈춰!
내 자신을 알 필요만 없다면, 무슨 일이라도!'
물가에 정박하고 싶은 배가 있다. 바로 여기서 정박을 시도한다.
앞으로도 수천 번 시도하리라.
숲의 어둠으로부터 길다란 갈고리 장대가 나타난다. 열린 창을
밀고 들어와,
춤으로 몸 덥히는 파티 손님들 사이에 섞인다.
3
내 삶의 대부분을 살아온 아파트가 철거되려 한다. 벌써 많은 것이
비었다. 닻이 풀렸다. 계속되는 슬픔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이 아파
트는 도시 전체에서 가장 밝은 아파트다. 진실은 가구를 필요로 하
지 않는다. 내 삶은 큰 원을 한 바퀴 그리고, 막 출발점으로 돌아왔
다. 날아가 버린 방. 이곳에서 내가 살 비비며 살아온 물건들이 이
집트 그림들처럼, 묘지 내실(內室)의 장면들처럼, 벽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빛이 너무 강하여 그림이 점점 흐릿해진다. 창들
이 훨씬 커졌다. 빈 아파트는 하늘을 향한 커다란 망원경. 퀘이커
교도들의 예배 때처럼 사방이 조용하다. 들리는 것은 오직 뒤뜰에
서 비둘기들이 구구대는 소리뿐.
- 기억이 나를 본다, 들녘, 2011
* 채호기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를 읽다보니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집, '기억이 나를 본다'가 떠오른다.
오늘이 송구영신하는 날이라서 더 이 시들을 돌아다보게 된다.
오늘은 모두가 한해를 돌아보며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각각의 마음들을 들여다 볼 테다.
후회되는 일, 슬펐던 일, 기뻤던 일, 잘 했던 일 등등이 떠오르고
내년에는 더 잘 살아야지 다짐을 해보는 그런 저녁, 그런 밤이 될 게다.
퀘이커 교도들의 예배처럼 사방이 조용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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