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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번안곡 [이기리]

by joofe 2022. 5. 17.

번안곡 [이기리]

 

 

 

 

빈방은 파동

닫으면

더 정확한 울음을 들을 수 있다

 

천장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변기 물을 내리고 그릇을 깨고 벽을 친다

 

물을 머금고 웅얼거리는 듯한 대화가 거뭇한 방을 맴돌고

이따금 고함과 비명이 두 귀를 잡아당긴다

 

위에서 들리는 건지 아래에서 들리는 건지 헷갈려서

문고리를 돌리다 말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녹슨 경첩을 보고 있으면

저녁이 창문을 찢고 들어온다

 

벽지는 갈라지는 방식으로 숨겨진 틈을 찾는다

침대와 벽 사이에 끼어있는 왼팔

누워 있는 것조차 버거울 때

 

안의 소리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동안

먼저 밖으로 빠져나간 소리가

다른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약한 방들이 많고

가까울수록 파장은 커진다

 

밤새 닫아 두었던 문을 열고

밖에 나오니

흰빛에 가까운 뒷모습이 들썩이고 있다

 

           -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민음사, 2020

 

 

 

 

* 녹슨 경첩이라든지, 갈라진 벽지라든지 좀 노후된 방을 연상케 하고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원룸일 수도 있다.

아파트도 층간 소음은 만만치 않다.

방에서 들리는 소리는 생활의 소리임에도 모든 게 소음으로 들린다.

오토바이 붕붕거리는 소리, 윗집에서 변기에 오줌 누는 소리, 치맥을 하는지 깔깔거리는 소리,

싸우는 소리, 속상해 우는 소리, 식탁 의자 끄는 소리, 고양이가 아가 성대모사하는 소리, 

정확하지는 않아도 밤새 티비에서 웅웅거리는 소리 등등.

새소리나 빗소리 빼고는 모두가 소음으로 들리고 그 파동은 짜증과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그런데 그게 정확히 윗집인지 그 옆집인지 알 수가 없다.

가끔 엉뚱한 집에 찾아가 항의하다가 "보세요, 저희는 아가를 키우지 않아요. 아기 울음소리라뇨?'

헛발질 하는 경우도 본다.

 

창조주가 웬일로 우리를 소음에 민감하게 만들었을까.

개울물 흐르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삼겹살 굽는 소리는 아름답게 들리게 하고

생활의 소리는 왜 소음으로 들리게 하였을까.

생활의 소리를 잘 번안해서 예쁜 소리로 듣고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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