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 밤 [신용목]
나는 하루를 살았는데, 생각 속에서 삼년이 지나가고
넌 그대로구나?
꿈에서는 스물하나에 죽은 친구가 나타나, 우리가 알고 지낸 삼년을 다 살고
깨어나면 또 죽고
열아홉 살이었을까요, 다락방에서 고장 난 시곗바늘을 빙빙 돌리다 바라보면
창밖은 시계에서 빠져버린 바늘처럼 툭 떨어진 어둠
그러니까
열아홉을 떠올리는 일은 열아홉이 되는 일이 아니라 열아홉까지의 시간을 다
살게 하는데, 어둠 속에 촘촘히 박혀 있는 시곗바늘처럼
창밖에는
숲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들었을 뿐, 생각은 해마다 달력을 찢기 위해 먼 나무를 쓰러뜨리는 푸른 벌목장입니다
숲이 사라지면 초원이
초원이 사라지면
사막이
죽은 짐승의 뼈를 하얀 가루로 날릴 때, 모래에 비스듬히 꽂힌 뿔이 가리키는 침묵처럼
세벽 세시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야기
눈을 감으세요,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이미 죽어서 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당신은 죽어야 합니다 긴긴 밤이라면
귀를 막으세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는 죽어서 이 이야기를 영영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긴긴 밤이라면
당신은 어디 있나요, 두리번거리며
태어나지 않은 사람의 죽음을 찾습니다 긴긴 밤이라면
그건
우리 다 아는 이야기,
잠으로는 견딜 수 없는 사라짐을 위하여 나는 새벽 세시에 깨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생일을 지나가는 것처럼
창밖에는 바람이 분다고 들었습니다
저녁에 헤어지고
다음날 만났을 때, 네게 십 년이 지나갔구나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감아놓아서
밤은 캄캄합니까 열아홉 살 다락방, 시계 속 단단하게 감겨 있던 검은 태엽처럼
열아홉은 꽁꽁 묶인 채 사라졌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을 묶어놓아서 밤은
날마다 굴러옵니까
- 계간 '철색종이' 2022년 봄호
* 일천구백칠십팔년,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TBC 라디오에서는 밤 늦게 '너와 난 빨간풍선'이라는 연속극을 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시계 치차가 보이고 철썩이는 바다가 떠오른다.
아프고 눈물나는 연속극이라는 것만 남아서 이야기보다는 산울림의 노래만 가끔 가만가만 불러본다.
"휘파람을 불지마 그건 너무 쓸쓸해
촛불을 끄지마 어두운 건 싫어
너와 난 빨간 풍선 하늘 높이 날아
가슴 깊이 묻어둬 너의 슬픔일랑
휘파람을 불지마 그건 너무 정다워
촛불을 끄지마 어두운 건 싫어
휘파람을 불지마 기다림이 무서워
촛불을 끄지마 님 모습 떠올라
조용한 숲속길을 마냥 걷고 싶어
아무말도 하지마 가슴속 눈물일랑
휘파람을 불지마 이 조용한 밤에는
촛불을 끄지마 어두운 건 싫어
어두운 건 싫어
어두운 건 싫어 "
(긴긴 밤,을 읽으며 문득 라디오 연속극이 떠올라 노래 불러본다. 주인공의 이름은 나미와 준수.)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거룩 [문성해] (0) | 2022.05.27 |
---|---|
하이에나의 시 [유미애] (0) | 2022.05.26 |
17번 홀에서의 무반주 첼로 독주 [송찬호] (0) | 2022.05.20 |
목단 [고영민] (0) | 2022.05.20 |
애사 [윤의섭] (0) | 2022.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