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와 감상

동화사에서 [조용미]

by joofe 2022. 5. 29.

 

 

 

 

동화사에서 [조용미]

 

 

 

 

먹구름을 따라 불길하게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까마귀떼,

비 온 뒤 팔공산 전체를 온통 뒤덮고 있다

수만 장의 종이를 태워 재를

하늘로 날린 듯 새까맣게,

꼬불꼬불한 산길 따라 무작정

숲속을 파헤치며 오르는데

으악으악

음산하고 적막하게 머리 위를 선회하며

악동처럼 울어댄다

 

산중턱에 오르자 매섭게 얼굴을 후려치며

나뭇가지에 맺힌 빗방울들을 

투두두둑 떨어뜨리고 가는 차고 거센 바람,

바람이 거칠어지는 만큼 나의 호흡은 

깊어지고, 소나무가 많아 겨울 산은 푸른데

붉은 솔가지며 떨어진 나뭇잎들

발길마다 수북수북 쌓여 있어 산은

속이 깊을수록 가을이다

 

대나무 숲으로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동화사 뒤켠 산언덕에 빽빽하게 들어찬

짙은 초록의 장막,

그 속에 휘어진 대나무라니

(휘어질 줄 아는 저 곧은 마음)

어느새 한없이 작아진 내가

숲의 정령이 숨쉬고 있는 저

깊은 초록의 그늘 대숲의 비밀스런 문을 열고 

은밀하게 들어선다

 

바람에 댓잎 부딪는 소리를 들으며

산사를 내려오는데

등뒤로 가득한, 영혼의 뒷덜미 부여잡는

까마귀 울음소리

머리끝 조여오는 예감에 고개를 천천히 돌리는데

긴 한숨 내려 쉬는 산등성이에 걸린

음험한 구름이 다시 뚝뚝 떨어뜨리는

응고된 빗방울들,

젖은 땅이 두 다리 사이를 과속으로 달린다

소금기둥이 된 뒷덜미를 버려두고

내가 가야 할 길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문학동네, 2021

 

 

 

 

 

 

* 대략 이천 오년쯤일텐데 회사 부서 직원들과 거래선 직원이 합동으로

팔공산을 등산하게 되었다.

시월 삼십일인데 출발하자마자 폭설이 내렸다.

겨울도 아닌데 웬 눈이 그리 많이 오는지 동화사를 끼고 오르다

도저히 미끄럽고 앞이 안보여 등산을 포기하고

동화사에서 눈을 피해 눌러 앉았다.

대개 산사에서는 기왓장 값을 주면 차를 마실 수 있는데 눈이 너무 많이 오고 

산사에 머무는 등산객이 많아서인지 차를 끓이지 않았다.

두시간을 기다리다 산사를 내려오게 되었다.

우리 일행 말고도 많은 등산객이 기다렸는데 끝내 차를 마실 수 없었다.

두시간동안 수행을 한 셈이다.

벽 보고 앉아서 묵상한다고 따뜻한 차는 나오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달은 거다.

 

요즘은 웬만한 산사에는 따로 차를 파는 공간이 있어 동화사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만

일부러 동화사까지 갈일은 없다.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부러지는 것들 [박용하]  (0) 2022.06.05
1995년 여름 [최지인]  (0) 2022.06.04
지나간 가을 이야기 [조현정]  (0) 2022.05.28
합창 [강성은]  (0) 2022.05.28
빗장 [이은규]  (0) 2022.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