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여름 [최지인]
이놈의 집구석
넌더리가 난다고 했던 주말 오후에는
소면 삶고 신 김치 잘게 썰어
양념장에 비벼 먹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끝나기만
기다렸다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귀를 막았다
어머니는 멍든 눈으로
부서진 가구를 밖에 내놓고
금이 간 유리창에 셀로판테이프를 붙였다
출근하지 않고 틀어박혔다
문을 두드려도 기척이 없었다
나는 동급생들과 아파트 단지를 뛰어다녔다 자전거를 훔
쳐 타고 슬프다 슬펐다 언덕을 오르내렸다 가장 먼 곳을 향
해 페달을 쉬지 않고 밟았다 옳다고 믿었던 건 옳지 않은 것
뿐이었다
슬픈 마음이 안 슬픈 마음이 될 때까지
나는 슬플 때마다 슬프다고 말했다
여성복 점원이 엄마야? 하고 물을 때
누나예요 하고 답하면 어머니가 생긋 웃었다
강 너머에서 어느 일가족이 연탄가스 마시고 세상을 버렸
다 세상은 반듯하게 누워 뭉그러졌다
화장품 가게에서 일하는 어머니도 한때는 무용수였다 나
는 종종 무대에서 춤추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팔과 다리를 길게 뻗었고 박수와 함께 허공 속
으로 사라졌다
나는 시시한 이야기를 지어낸 셈이다
*
잠든 어머니 가슴에 귀를 대고
가만히 숫자를 셌다
그해 여름
어머니는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해서
이룬 게 거의 없었다
-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창비, 2022
* 나는 이 시의 제목을 이십년 앞당겨 1975년으로 되돌려본다.
시인이 쓴 환경과 결코 다르지 않다.
그때에도 먹고 살기는 퍽퍽했고 밥상은 엎어졌으며 눈은 멍들어 있었다.
아니 이십년 뒤로 돌린 2015년도 크게 다를 건 없다.
해마다 최저임금이 오른다지만 오른 만큼 물가도 올라 햄버거 사먹긴 결코 쉬워지지 않았다.
정규직이 되기 어려운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어느 티비 방송에서 지금은 무명을 벗은 배우가 고백하길 뮤지컬배우로 한달 활동해서 고작
십오만원을 받아서 세식구가 먹고 살긴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갓난 아기 분유값도 안되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게 세월이 흘러 이제는 밥은 먹고 산다는 것이니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가를 말해준다.
시집의 제목이 '일하고 일하고 사랑하고'인데 시인의 의도와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살아가려면
일하고 또 일하고 그래야만 사랑도 할 수 있다.
소면 삶아먹는 게 아니라 밥을 먹을 수 있고 사랑도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아, 살고 있구나!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청년들이 무슨 고민이 있고 무슨 어려움이 있는지는 어른 세대도 잘 알고 있다.
비정규직이라고 비관하지 말고 지금 하는 일이 천직이라 생각하고 3년만 버티어 보자.
서당개도 3년을 해야 풍월을 읊는다지 않는가.
청년들이여, 끝내 이겨내는 청춘이 되길 응원한다. 파이팅!
** 22년 시와편견 여름호에 실린 주페의 '시와 감상글'입니다. 일명, '파란글'
12편이 몽땅 실려서 깜짝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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