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 [문태준]
허름한 식당에서 국밥을 한술 막 뜨고 있을 때 그이가 들
어섰다
나는 그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수레에 빈 병과 폐지 등속을 싣고 절룩거리며 오는 그이를
늦은 밤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이는 식당 한편 벽에 걸린 달력의 28일을 오른손으로
연거푸 짚어 보였다
무슨 말인가를 크게 했으나 나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
었다
식당의 여주인은 조금도 언짢아하는 기색이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짧은 시간 후에 그이의 앞에 따뜻한 밥상이 왔다
- 아침은 생각한다, 창비, 2022
* 빈 병과 폐지를 모아 팔아봐야 몇천원일텐데 사실 한끼를 사먹기도 버거운 편이다.
28일엔 한달치 수고비를 받는 날인가 싶다.
자신있게 큰 소리 치는 건 28일엔 외상값을 갚겠다는 뜻이겠다.
여주인이 긍정적으로 끄덕인 건 그간에 신뢰를 쌓았다는 것 같다.
어쨌거나 당당히 외상으로 따뜻한 밥상을 받게 되었으니 인간적이기도 하고 넉넉한 인심이 느껴져서 좋다.
허름한 식당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크고 번듯한 식당에서는 어림도 없을 일이다.
불편한 몸으로도 열심히 살아가는 그이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고
따뜻하고 인심 좋은 여주인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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