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어놓고 웃었다 [채수옥]
보도블록으로 덮인 길의 중간이 끊겼다 공사하다 남
은 것들을 검은색 천막으로 덮어 놓고 통행금지 푯말을
세워 놓았다 무엇이 덮여 있는지 모른 채 덮어놓고 돌
아갔다 덮어놓고 길을 걷고 덮어놓고 밥을 먹었다 덮어
놓고 오열하고 덮어놓고 섹스를 했다 너는 그것을 덮어
놓고 믿었다 물어볼 용기가 없을 때 덮기로 했다 덮어놓
고 관광버스에 올라 덮인 사람들과 관광을 떠났다 문제
가 발생하기 전에 먼저 덮었다 시간은 덮어놓고 흘러가
고 나는 덮어놓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갔다 덮어놓고 저
녁이 왔고 우리는 덮어놓고 이별을 했다 덮는 것이 상책
이라고 생각했을 때 덮어야 하는 것들은 더 많이 생겨났
다 보도블럭을 덮었던 검은 천막은 공중에서부터 땅까
지 그 너머의 것들을 덮고 있었다 검은 천막은 점점 크
고 넓게 퍼져나갔다 우리는 더 멀리 돌아가야 했다 검은
색 우산들로 상체를 가린 사람들이 앞장서서 걸어간다
- 덮어놓고 웃었다, 여우난골, 2022
* '덮어놓고'라 하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덮어놓고'라 하면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 같다
'덮어놓고'는 그 뒤에 괄호 열고 저질러 놓고 괄호 닫고,가 따라오는 것 같다.
덮어놓고 (저질러 놓고)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
덮어놓고 애인을 만들고, 덮어놓고 결혼을 하고, 덮어놓고 아이를 낳고
덮어놓고 '어떡하지?'
덮어놓고 정치인에 입문하고, 덮어놓고 공약을 걸어 당선되고, 덮어놓고 실정하고
덮어놓고 '어떡하지?'
덮어놓고 주식을 시작하고, 덮어놓고 돈까지 빌려 올인하고, 덮어놓고 폭락하고
덮어놓고 '어떡하지?'
사람이 하는 일이 다 그렇다.
찬찬히 덮어 놓은 것을 들추어 살피고 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천막은 왜 쳤을까? 왜 까만색일까? 앞서 가는 사람들은 왜 검은 우산을 쓰고 갈까?
돌아보면 '덮어놓고' 저지른(?)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웃게 될 것 같다.
실소일 수도 있고 참 잘했어요!일 수도 있다.
누구나 덮어놓고 웃는다.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흘려 쓰다 [박완호] (0) | 2022.06.16 |
---|---|
금지된 삶 [김호성] (0) | 2022.06.15 |
포장마차 국숫집 주인의 셈법 [배한봉] (0) | 2022.06.13 |
가위바위보 [김승] (0) | 2022.06.12 |
튤립 [김혜영] (0) | 2022.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