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려 쓰다 [박완호]
끝과 처음사이에서 자주 길을 잃는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다 입구 같고 출구 같지만
어느 것도 아니었던
항문과 입이 한 덩어리인 길들의
변덕 또는 능청.
해면에 흘려 쓴 글씨처럼 일그러지는
서로 겹치며 비껴간 발자국들.
마지막이라고 느낀 자리가
처음 그곳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길에서 막 나왔는데 또 길 위에 서 있는 나.
어디에나 서 있는 내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 문득 세상 전부가 되는 누군가처럼, 북인, 2022
* 끝과 처음 사이에서 방황한다는 건 끝까지 가보았는데 길을 잃었다고 깨달은 것이다.
처음의 초심을 처음부터 잃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시종일관이란 말도 있고 철두철미라는 말도 있다.
그러기가 쉽지 않기에 사자성어로 초심을 지키게 하는 것일 게다.
세상의 전부를 얻었다고 느낄 때가 가장 위험할 때이다.
방탕해지기 쉽고 교만해지기 쉽다.
그것은 마치 로또에 당첨되어 세상천하를 다 얻은 것처럼 무엇이든 다 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많던 돈은 방탕과 교만이라면 곧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가난했을 때에는 부자가 되면 이웃과 나눌 것이라 생각했지만 갑자기 부자가 되니 방탕하고 교만해진 거다.
시종일관과 철두철미를 흘려 쓰지 말아야 한다는 건 살면서 늘 가슴에 새겨야할 일이다.
성실(誠實)이란 말한대로 행하면 이루어지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니 성실하게 처음과 끝이 같도록 살아야 한다.
心淸事達을 붓글씨로 정성스레 써준 친구에게 始終一貫도 하나 더 써달라고 해야겠다. 흘려쓰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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